성탄절에 복음이 주는 두 가지 위로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비참함과 고단함을 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인생에 대해 일찍 알아버린다면 사람들은 저마다 비참함을 감추거나, 잊어버리거나, 달래거나, 극복하려고 살아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비참함을 감춥니다

– 비참함을 잊어버립니다

– 비참함을 달랩니다

– 비참함을 극복합니다

첫 번째 방식은 비참함을 스스로는 인정하되, 남에게 감추려는 전략입니다. 피상적으로 보면 다른 사람들은 비참해 보이지 않습니다. 남들은 눈부신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의 누추함을 감추려 합니다. 이것이 타인의 시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인식과 결합하면 남들에게 그럴 듯해 보이는 삶의 포장지를 입는데 익숙해집니다.

두 번째 방식은 비참함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택하는 전략입니다. 잊어버리고 싶다는 것은 마음 깊은 속에서는 너무나 비참하고 괴롭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마음의 중심부에 있는 고통을 잊어버리려 해보지만, 결국 그 중심부의 고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잊어버리기 위해서 취하는 꿈에서 깨어나면 다시 그 자리입니다.

세 번째 방식은 비참함을 달래는 것입니다. 비참함을 인정하되, 다른 것으로 위안을 삼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강력한 동기부여 수단으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열등감을 다른 성취감으로 달랩니다. 한 차원의 비참함을 다른 차원의 달콤함으로 달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고통이 되는 차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한 여전히 비참합니다.

네 번째 방식은 비참함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비참함을 인정하고 그 비참함을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의 생각으로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극복한 것은 감사로 남기도 하지만 자랑으로 남아 또다른 무기가 되어 버립니다. 극복하지 못한 것은 또다른 트라우마로 남아 마음에 상채기로 남아 아프게 합니다. 한 가지 비참을 극복하지만 또다른 비참이 생깁니다.

이 네 가지 방식은 비참함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참함은 나쁜 것이라고 보는 전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 아주 솔직하게 말합니다. 인간은 비참합니다. 인간 본성 안에는 미쳐 날뛰는 야수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는 내가 왕이 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헤롯왕이 준동하기도 합니다. 인간 본성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가끔씩 하나님을 찾기도 하고 진선미를 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본성 안에는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어두움과 불안함과 낯설음과 악함이 존재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비참한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그리 숭고하지도 않고 인간은 그리 이타적이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최고의 존재도 아닙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성탄절은 우리에게 인간의 비참을 고발합니다. 무한한 절대자가 무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셨다는 메시지입니다.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구원자께서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탄절은 인간에게 구원의 필요성을 알려줍니다. 창조주요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되 절대적으로 사랑하셔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성탄절에 받는 복음의 제1위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모든 비참의 원인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독립선언을 한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죄의 본성을 가지고 사람은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타인들의 이기성과 악함에 의해 피해자가 되며, 악의 구조 속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됩니다. 상처받고 미움받고 무시받고 고통 받은 피해자가 어느 순간 상처주고 미움주고 무시하고 고통주는 가해자가 됩니다. 죄와 악의 무한 사슬 속에서 인간은 비참함에 빠져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신 하나님은 인간의 비참함 속으로 스스로 오셨습니다. 가해자가 되지 않고 피해자가 되기만 하신 유일한 분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슬픔의 비참함에서 건지시는 구원자이십니다. 크리스마스는 복음이 주는 위로를 나눕니다. 비참에서 건지시는 예수님. 다른 사람을 비참하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 그 사랑을 우리는 받았고 깨달았고 누리며 살아갑니다. 복음이 주는 위로를 받은 사람들은 다르게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 비참함을 겪는 사람과 공감합니다

– 비참함을 겪는 사람과 함께 합니다

– 비참함을 겪는 사람을 위로합니다.

– 비참함을 겪는 사람이 일어나도록 도와줍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사랑이며, 우리가 주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비참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비참은 당연한 인간 조건입니다. 귀중한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겪는 비참이 무엇이든, 어떤 것이든, 어느 정도든 간에.. 그 속에서 사랑하기를 선택합니다. 개인적 차원, 조직적 차원, 구조적 차원, 제도적 차원… 여러 층위와 역할 가운데 사랑을 선택합니다. 성탄절에 받는 제2위로는 나의 모든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위대한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2018년 12월 23일

뉴시티교회 오종향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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