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정한 이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비유를 주셨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처럼 되었다 (누가복음 10:30).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마음 중심에 두면 그것이 어느 순간 강도로 변한다.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람의 마음 중심 깊은 곳에 모시고 살면 언젠가는 그것이 강도로 돌변한다. 옷을 벗겨 수치스럽게 하고, 때려서 아프게 하고, 거의 죽을 정도의 상태까지 가게 된다. 벗기고, 때리고, 죽게 한다. 그리고 그 강도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떼강도이다. 마태복음 9:36은 다음과 같이 인간의 상태를 묘사한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여기서 성경원어를 살펴보면, ‘고생한다’는 것은 ‘찢기다, 가죽을 벗기다, 갈기갈기 썰리다, 괴롭힘 당하다’ 등의 의미이다. ‘기진했다’는 것은 ‘팽개쳐지고 내동댕이쳐져 버려진’ 참담한 모습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강도 당한 인생의 모습인 것이다.
“강도들”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추구하는 그것들은 무엇일까? 돈을 벌기? 돈을 지키기? 돈을 버는 능력? 사람을 움직이는 힘? 일을 만드는 지도력? 사람을 이끄는 영향력? 사람들에게 존경받기? 능력을 확인하기? 남보다 출세하기? 최고가 되기? 편안하게 살아가기? 넉넉하게 살아가기? 남성다움? 여성다움?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어머니에게 사랑받기? 상급자에게 인정받기? 사랑받기? 위로받기?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좋은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려야할 마음의 깊은 중심을 이것들이 차지할 때는 우리가 정성을 드리는 대상이 강도들로 변해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의 인정을 마음 중심에 두고 살면 사람들의 인정 때문에 수치당하고 아프고 큰 고통을 겪는다. 내 능력으로 내 마음의 중심을 삼으면 그것이 강도로 변해서 벌거벗기고 매질하고 죽을 정도까지 가게 만든다.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내 마음의 중심 삼으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 강도 당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자비를 베푼 이”였다 (누가복음 10:37). 강도 당한 유대인에게 자비를 베풀고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그가 무시하고 혐오하고 경원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여기서 예수께서 하신 비유는 급반전을 이루게 된다. “내가 사랑해야 할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한 어떤 자신만만한 율법사에게 예수께서 하신 대답은 “그대가 강도 만날 때 그대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곧 그대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신 말씀은 결국 그대가 강도 만나서 맞고 헐벗고 아프고 죽게된 상태에 있을 때 누군가 자비를 베풀어야 하듯, 그대도 원수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라는 말씀이다.
이 비유를 접할 때에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 분이 바로 예수시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놀라게 된다. 떼강도 만난 인생에게 자비를 베푸신 분이 바로 예수이시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서 나를 살리신 분이다. 창조주를 혐오하고 싫어하고 미워하고 관심도 없고 상종도 안하려고 하는 우리 인생에게 (참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이도 없고…”) 찾아오셔서 가장 큰 자비를 베풀어 주신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따라서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를 타기하고 무시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조차도 “가서 이와 같이”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하셨듯 자비를 베푸는 인생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뉴시티교회 오종향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