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꽤나 유명하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 비유는, 듣는 이의 마음에 묵직한 부담감을 남기곤 한다. ‘세상에서 더 착하게, 더 정직하게, 더 흠 없이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 말이다. 실수라도 하면 공동체의 명예에 흠을 낼까 봐, 자신의 신념을 잠시 숨겨본 경험이 있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유명한 비유에는 우리가 흔히 놓치는 놀라운 관점이 숨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금이 되어라’는 무거운 과제를 준 것이 아니라, ‘너희는 이미 소금이다’라는 정체성을 선물로 선포했다는 사실이다.
이 관점의 열쇠는 ‘소금’의 상징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있다. 우리는 흔히 소금의 ‘맛’을 개인의 ‘도덕성’이나 ‘선한 영향력’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고대 근동의 문화, 특히 구약 성경에서 소금은 제물에 더하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언약’(레 2:13), 즉 은혜를 상징했다. 소금의 맛은 처음부터 ‘은혜’를 가리키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맛을 잃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예수 시대의 ‘암염(Rock Salt)’ 비유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유통되던 소금에는 석회 같은 광물질이 섞여 있었는데, 습기를 만나 순수한 소금 성분(NaCl)이 다 녹아버리면 겉모습만 비슷한 ‘맛 없는 광물 가루’만 남았다. 이것이 바로 ‘맛을 잃어 길에 버려져 밟히는’ 것의 실체였다.
이를 우리 삶과 신앙에 적용하면 의미가 완전히 새로워진다. ‘맛을 잃는다’는 것은 어쩌다 한번의 도덕적 실패가 아닌 게다. 삶의 본질인 ‘은혜’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것. 거기다, ‘…해야만 한다’는 율법주의의 메마른 껍데기만 남아버린 상태가 바로 맛을 잃은 상태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스스로 소금이었던 적이 없다. 맛을 잃고 세상에 버려져 짓밟힐 운명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 모든 멸시와 짓밟힘을 대신 짊어졌다. 그로 인해 우리의 정체성은 나의 성취나 출생이 아닌 오직 ‘은혜’ 위에 세워지게 되었다.
예수님이 맛을 잃은 소금처럼 십자가에 버려졌기에 우리는 은혜로 맛을 내는 존재가 되었고, 그가 어둠 속으로 들어왔기에 우리는 빛이 되었다. 우리가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에 ‘소금’으로 찾아와 친히 녹아들어 자신의 맛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부담이 아니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소금이다!’라는 기쁨과 감사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의 역할은 높은 도덕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소금 되게 한 그 놀라운 은혜를 삶으로 자연스럽게 비추는 등불이 되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 손해 보는 것 같은 순간에 이 진실을 떠올리는 것은 어떨까. “나는 내 노력으로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이미 소금이다.”
그 은혜에 대한 자각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고 맛깔나게 만드는 진정한 힘이다. 도덕이 아닌 은혜로 맛을 내는 삶이 진짜다.
#오종향목사 #세상의소금과빛 #도덕이아닌은혜로 #은혜의언약 #본질 #율법주의 #정체성 #신앙컬럼 #인문학 #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