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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교회시대, 교회가 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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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city church newcity church
작성일
2018-10-17 19:36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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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교회시대, 교회가 갈 길 (기독경영연구 2012년 12월호)

탈교회시대, 교회가 갈 길 (Korean Church in the post-church era)

오종향 (Jong Hyang Oh)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외형적으로 부풀려진 채 알려졌다. 세계 제2위의 선교사 파송국가이며,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 중에 몇 개가 서울에 있다. 한국의 성도수는 1천만이 넘는다고도 했고, 때로는 1천5백만 성도라는 말도 나왔었다. 그런데, 2005년 통계청 전수인구조사 결과 862만인 것으로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지난 1995년부터 2005년 사이에 교회를 이탈한 사람이 무려 76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이 추세는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가톨릭이 개신교를 추월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예측이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인 모습이 존재한다. (1) 한국갤럽과 한미준이 공동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1984년부터 2004년 사이에 교인들의 종교생활 몰입도 (성경읽기, 예배출석하기, 헌금하기)는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히 나빠졌다. (2) 교인들의 자기 교회에 대한 만족도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교인들 자신도 한국교회 전반에 대해서는 신뢰하지 못한다는 사람이 훨씬 많다. (3) 이른바 대형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자신의 교회에 대한 만족도와 자긍심이 특히 높다. 그러나, 대형교회에 대한 사회의 신뢰도는 1998년 28%에서 2004년 2%로 급락했다. 이 세 가지 모습에서 안팎에서 느끼는 온도차이를 확인하게 된다. 내부에서 보는 모습과 외부에서 보는 모습에 현격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러한 자료들이 의미하는 것을 몇 가지로 생각해 본다.

 

첫째, 한국이 ‘탈교회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바로 교회 자신이다. 특히 대형교회, 유명교회를 중심으로 교회외연 확장정책을 여전히 펴고 있는 것을 살펴보면 이들은 탈교회시대를 살아가는 해법으로 ‘성전건축’과 ‘교회외연확장’을 붙들고 있지 않나 의구심이 든다. 교회 내부 입장으로 보자면 ‘기독교사회’에 진입하기도 전에 ‘탈기독교사회’의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중심부가 아니다. 주변에 있다. 교회는 사람들이 들어오고 싶어하는 곳이 아니다. 될수록 피하고 싶어하는 곳이 되었다. 신앙은 세련되고 멋진 사람들이 고려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 바깥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탈교회사회이다. 이것은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이 30년 전 또는 60년 전부터 먼저 경험해온 것들이다. 선교사 레슬리 뉴비긴이 인도에서 30년 간 사역하고 다시 영국에 돌아갔을 때, 그는 영국이 인도와 다르지 않은 선교지임을 발견했다. 유사한 일이 한국에서 진행 중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국이 선교지라는 사실이다. 이제는 선교지가 국경이나 해안선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복음이 다시 필요한 ‘신 선교지’이다. 선교지에서는 선교전략이 나와야 한다. 선교지 연구부터 제대로 되어야 한다. 하다못해 시장분석, 포지셔닝이라도 해야 한다. 타게팅도 제대로 해야 한다. 한국은 이제 선교지인데, 아직도 기독교국가의 미도래를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단한 착각이다. 2007년 수없이 벌어졌던 평양대부흥 관련 집회들에 대해 내가 느꼈던 불편함의 한 가운데는 그 모임들과 사람들이 너무나도 열렬히 한국이 기독교국가가 되기를 염원하더라는 것이었다. 기독교국가가 마치 곧 올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때도 이미 한국은 선교지였다. 비신자가 10%, 20%인 것이 아니라, 신자가 10%, 20% 하는 상태이다. 한국이 탈교회시대라는 것은, 교회가 지난 몇 십년간 잘해왔던 방식들을 고수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준다. 상승기와 하강기에는 전략을 달리해야 한다. 한국은 선교지이다. 그런 마음으로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연구하고 복음을 소통하고 접촉점을 넓혀야 한다.

 

둘째, 한국 교회들이 상당히 내부지향적이라는 점이다. 한국교회들은 상당히 내향적이다. 수많은 사회봉사, 구제, 선교활동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회들은 폐쇄적일 정도로 내부지향적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내적인 헌신의 열기는 높았다. 교회 자체의 활동에 대한 교인들의 몰입도는 아직도 높은 편이다. 주일에는 반나절 내지 하루 종일 교회에서 살다시피 한다. 인정받는 교인이라면 새벽기도, 철야기도, 수요예배, 금요예배, 소그룹모임에 참여한다. 게다가 제자훈련, 사역훈련, 부서활동, 선교회모임, 전도활동, 당회 등 모임도 많다. 그렇게 많은 단기선교와 전도활동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본질적 방향 자체는 강력한 내적 구심점을 만들어서 성도들을 교회 주변에 맴돌게 하는 것이다. 내적치유, 영성훈련, 기도모임, 성경공부, 소그룹 등을 많이 하지만, 결국은 내부지향적이다.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하는 것이다. 성공적인 교회란 교인들을 교회 활동에 바쁘게 만드는 교회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다. 모여서 공부하고 기도하고 밥먹고 차마시고 잡담하고 그뿐이다. 자기들만의 리그이다. 그들만의 리그. 이것이 한국교회들이 보편적으로 가진, 비신자들이 볼 때 기분나쁜 폐쇄성이다.
이 모든 모임은 믿는 우리끼리를 전제로 하고 이루어진다. 전도를 ‘나갈’ 때나 선교를 ‘갈’ 때에만 아직 믿음이 없는 외부인의 존재를 상정한다. 한국교회의 평균적인 모습은 믿음이 아직 없는 사람이 와서 견디기에는 참으로 어색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나 믿음이 ‘약한’ 사람은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다. 성경적인 원리는 다르다. 예배와 모임에 비신자가 늘 함께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예배와 모임을 준비해야 한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를 하면 믿음 없는 사람이 아멘을 한다고 했는데, 바로 이것이 그 원리이다. 비신자, 초신자, 질문이 많은 사람, 궁금한 것이 많은 사람들의 존재와 생각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런 분들이 와서 예배나 모임 가운데 자연스럽게 질문하고 대화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관심사들에 대해 답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을 투명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출석과 참여를 긍정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들이 내부지향적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교회 안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알지만, 교회 바깥에서, 사회에서, 일터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사회화하지 못하는 요인이 된다. 삶의 실제가 안바뀌는 것이다. 결국 안팎이 다른 교인들이 많이 생긴다. 돈벌어서 십일조 하라는 가르침은 있어도 돈을 어떻게 벌지에 대한 가르침을 나누지 않는다면, 결국 신앙은 내부지향적으로 돌아간다. 또한, 무슨 전도집회가 되어야 비로소 친구나 가족을 데려와볼 생각을 한다. 평소에 교회에 데려왔다가는 아직 믿음이 없는 친구나 가족이 겪을 마음의 불편함을 생각하니 데려올 수가 없는 것이다. 역설적인 사실로서, 교회들이 너무나 내부지향적으로 움직여서 외부적 확장성이 없다보니까 전도모임, 무슨 전도축제, 새생명축제 등이 많은 것이다. 바울서신에서 바울이 대각성전도집회나 새신자초청집회를 기획해서 했다는 말이 없다. 왜 그럴까? 그들은 평소의 모임과 예배가 외부지향적이었기 때문이다. 외적으로 확장성이 있었다. 비신자들의 질문을 다루었다. 비신자들의 마음에 있는 궁금한 것, 고민하는 것, 그들의 세계관, 그들의 현재위치가 다루어졌다. 그런 점에서 성경시대의 교회는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었다. 누가 오더라도 그들의 질문들이 그들의 언어로 다루어지는 예배와 모임이었다.

 

셋째,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90년 이후 지난 20년간 추구하거나 동조해온 전략이 틀렸다는 것이다. 필자가 대학생이던 1990년부터 교회 대학부, 선교단체 연합집회, 선교 한국, 코스타 등을 통해서 끊임없이 들어왔던 메시지는 크리스천으로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숭고한 비전이었으며, 위대한 소명이었으며,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이루어야할 과업이었다. 영성과 전문성의 두 날개로 날아오르는 전문직 신앙인이 모범적인 신앙성장모델로 제시되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교회들은 한국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기를 염원하였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법조계, 언론계, 학계, 관계, 문화계, 경제계 등에서 다니엘, 요셉, 에스더와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인재를 기르는 것을 목표로 제시하였다. 개인 단위에서는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비전으로 제시되었다. 가족 단위에서는 신앙의 명문가를 이루는 것이 최고의 축복 비전으로 제시되었다. 개교회 단위에서는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는 비전이 선포되었다. 국가 단위에서는 한국교회 자체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제 국면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하는 비전이 추구되었다.
그러나, 20년 정도 후 그 결과는 죽음같은 참담함으로 나타났다. 개인 레벨에서는 엘리트주의, 성공지상주의, 신앙도구주의와 혼합하고 말았다. 신앙적 소명과 세상적 성공의 두 목표를 잡아야 인정받는 교인이 되는 분위기가 급속히 강해졌다. 소명과 비전의 이름으로 제시된 것이 사실상 성공의 우상, 자아실현의 우상으로 즉위하였다. 이 과정에서 성공의 사다리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많은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는 비통한 사태가 벌어졌다. 더 나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교회활동을 줄이라고 교인들은 고3자녀들에게 요구했고, 이제 그 자녀들은 더 나은 성공을 위해서 신앙활동 자체를 줄여버렸다.
가족 레벨에서는 가족이기주의를 기독교가 부추기는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내 가족만 괜찮으면 된다는 가족의 내집단성이 강한 우리나라 사회에서 신앙의 명문가 만들기 붐은 사실상 가족의 우상, 자녀의 우상, 가장의 우상을 왕위에 등극시키고 말았다. 한국교회들이 가정의 회복, 부성의 회복, 자녀교육 등에서 큰 기여기를 하기는 했다. 그러나, 자녀 잘 기르기, 멋진 가족 만들기, 자녀 위해 희생하기, 부권 인정받기, 효도받기 등에 지나치게 높은 절대가치를 부여하면서 가족이기주의의 공고화에 한국교회가 일조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개교회 레벨에서는 개교회의 세속화로 나타나고 말았다. 교회의 힘과 위상을 최대로 떨치기 위한 방법들이 모색되었고, 도입되었다. 복음적이지 않은 관리기법들과 마케팅 요소들이 무분별하게 수용되었다. 개교회들의 내부 운영에 있어서 비복음적이지만 세상적으로 유용하다고 받아들여진 교회기득권의 세습, 판촉식 교회홍보, 관람 위주의 교회생활 등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교회들이 무분별하고 수용하고 모방한 방식들은 일반적인 기업수준으로 봐도 형편없는 모습이어서 많은 비판을 사게 되었다. 교회가 유통기업에 비견되는 것도 이 과정에서 강해졌다. 교회들이 회사 운영하듯, 마트 운영하듯, 다단계회사 운영하듯 이루어지는 모습들이 너무 많아졌다. 교회를 대형교회-중형교회-소형교회-개척교회로 나누는 것은 대기업-중견기업-중소기업-영세기업으로 나누는 것과 비슷하다. 교회는 기업이 아니다. 그런데, 교회가 자기 본분과 목적을 상실하고 숫자에 의한 성장의 잣대를 가질 때, 교회는 나쁜 방향으로 세속화되었다. 돈의 우상, 수의 우상, 힘의 우상, 목회성공의 우상, 목회자 명예의 우상, 교회를 통한 자아실현의 우상 등이 한국교회들에 범람하고 있다.
한국교회 레벨에서는 교계 자체가 세상권력을 옹립하는 데 관여하기도 하고 (대선 또는 총선 개입, 한기총의 정치적 횡보), 세상권력 자체를 추구하기도 했다 (기독당 사건, 입법활동에 교회가 직접 개입하려고 했던 경우 등). 결과는 한국교회가 권력에 매우 가까워졌고, 때로는 실력행사를 통해 입법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사회전반의 신뢰는 상실했다. 원했던 권력에는 가까이 갔지만, 정작 복음의 능력에서는 멀어졌다. 조계종에서 연구조사한 결과를 보면, 한국 개신교는 사회적 영향력에서는 가장 강한 종교이지만, 호감도와 신뢰도에 있어서는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이제 정리를 해보자. 한국은 탈교회시대를 지나고 있다. 한국은 선교지이다. 교회에 좀 다녔다가 교회를 떠난 사람이 수백만 명 수준이다. 지난 25년을 누적해서 보면, 현재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의 숫자보다 두 배 정도 가까이 된다. 전도를 많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부인 입장에서 외부인에게 다가간 것이었다. 진정한 소통은 많지 않았다. 한국교회들은 너무나 내부지향적이고, 교회몰입적이다. 이것이 끊임없이 괴리를 만든다. 한국교회들이 추구해왔던 기독교국가는 지금 추구하면 안된다. 힘과 영향력의 추구는 개인/가족/교회/국가적 차원에서 모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는 복음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첫째, 새로운 교회들이 계속 필요하다. 선교지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마음과 사고와 심성과 가치관에 대한 심층 연구가 필요하다. 선교지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사회 주류에 편입하려고 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고 복음대로 사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선교지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교회가 많다. 한국교회는 바른 신학, 좋은 신학, 아름다운 영성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교회는 계속 필요하다. 선교지이기 때문이다.
둘째, 교회 바깥에 있는 분들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들만의 리그는 이제 그만해야 한다. 교회에 이미 중직 구성원으로 자리잡고 있는 분들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교회 예산을 사용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신앙의 질문, 인생의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답변을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교회들이 되어야 한다. 복음 중심적인 교회들이 더많이 필요하다. 습관 중심적인 교회들, 내부자 중심적인 교회들이 아니라, 예수님에 초점이 있으며, 복음의 역동을 가지며, 교회 외부를 향하여 시선과 손발이 향하는 교회들이 계속 필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복음중심적인 교회들이다. 건물이나 재정이나 인간적인 끈에 의해서 움직이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이 모든 것의 중심된 교회들이 필요하다. 어떤 예배를 오든지, 어떤 모임에 오든지, 새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적 여정과 인생의 질문을 가지고 복음 자체와 부딪칠 수 있는 교회들이 많아져야 한다.
셋째, 복음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교회들이 세상의 힘과 수와 돈을 추구하지 않기로 결단해야 한다.거대단일교회를 지향하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의 일부로서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교회 입장에서는, 단회적인 이벤트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나, 부교역자들이 사임하면 어쩔 수 없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주도적으로, 교회개척자들을 훈련하고 준비시켜서 교회를 계속 생성하는 교회들이 많아져야 한다. 대형교회가 아니면서 복음역동이 살아 있는 교회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대형교회들은 지금부터 건강한 분립과 해체를 준비하면 좋겠다. 대형교회가 된 다음에 분립하겠다고 하지 말고, 대형교회가 되지 않으면서 역동성 있는 진리와 은혜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면 좋겠다. 사업부제 등 20세기에 등장한 조직관리기법들이 사용되지 않아도 되는 사이즈로 교회들이 적정성장 목표로 삼는 교회들이 많이 세워지면 좋겠다. 교회가 복음의 진리를 관계성 안에서 인격에 담고, 함께 주님을 경험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에 좋은 유기적인 교회들이 많이 세워지면 좋겠다. 세상적 가치가 아니라 복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교회의 진정한 자랑이 되는 교회들이 많아져야 한다. 목회자들 입장에서는, 생활이나 생계나 생존이나 아니면 성공을 위해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장 탁월한 선물이 복음이며, 하나님 나라의 가장 탁월한 전략이 교회이기에 계속해서 교회를 개척하는 하나님의 운동에 동참하기를 원한다. 어떤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나 목회기법이 아니라, 복음 자체의 풍성한 재발견과 복음 안에 깊고 넓게 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정말로 복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 아버지가 되신다. 그는 만물을 지으셨고, 나를 만드셨고, 지금도 우리를 붙들고 지탱하고 계신다. 복음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다 비우시고 인간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를 만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으셨다. 사랑으로 자기를 던지셨다. 나의 죽음을 그가 대신해서 죽었다. 그의 생명을 대신 나에게 주었다. 인생의 저주를 그가 대신해서 받았다. 그의 축복을 대신 나에게 주었다. 나의 죄를 그 대신해서 벌받으셨다. 하나님의 상급을 대신 나에게 주었다. 정말로 이 복음을 믿어야 한다. 개인이, 가족이, 교회가, 한국교회구성원 모두가 이 복음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복음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모든 우상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만 높이는 참된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공이든, 자아실현이든, 가족의 평안이든, 가족의 행복이든, 자녀를 잘 기르는 것이든, 효도를 받는 것이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든, 교회가 성숙하는 것이든, 한국기독교가 부흥하는 것이든,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든, 그 무엇이든. 그 무엇이든 우상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하심이 중심에 있다. 하나님은 복음으로 일하신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우리의 삶을 개인, 가정, 교회, 국가적 단위에서 일치시켜 가는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의 소명이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길로 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