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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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센터처치 증보판

목회와 신학
작성자
newcity church newcity church
작성일
2018-10-17 19:33
조회
2383
서평: 센터처치 증보판 (목회와 신학 2018년 6월호)

복음으로 세우는 센터처치, 도시를 품는 센터처치,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

오종향

센터처치에서 ‘센터’가 의미하는 것은 교차로의 센터이다. 서로 다른 지역들, 서로 다른 골목들, 서로 다른 섬들을 연결하는 곳이 곧 센터이다. 여러 갈래의 길들이 만나는 곳에 도시가 형성된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지키는 것이 곧 센터이다.
1. 복음에 있어서는 두 편의 도적들 사이에 십자가가 서있다.
2. 도시에 있어서는 상황화를 과도하게 하거나 (대표적으로는 세속화가 이에 해당한다) 과소하게 하거나 (고립주의가 이에 해당한다) 하는 경우들이 있다. 전달자의 문화와 피전달자 문화 사이에 연결과 소통을 다룬다.
3. 운동에 있어서는 개인의 카리스마를 의존하는 교회와 조직의 체계성을 의존하는 교회 사이에서 센터의 지점을 찾아간다.
세 권, 여덟 개 파트, 삼십 개 장들마다 무엇이 센터인지를 보여준다. 어떻게 교회가 센터에서 벗어나 어떤 곳들에 치우치는지, 그러한 치우침이 어떻게 복음의 영광을 가리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치우쳐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복음의 역동성과 열매가 나타나는 센터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다. 모든 장들마다 이정표를 제시한다.

두란노서원에서 <팀 켈러의 센터처치>를 번역 출간할 때에 이 책이 한국 목회자들의 열독서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물론 아직도 이 책의 존재를 모르는 많은 분들이 있다. 그렇지만, <팀 켈러의 센터처치>는 원서의 작은 폰트와 빼곡한 편집 버전으로 400쪽, 번역서의 가독성 좋은 폰트 크기와 미려한 편집 버전으로 800쪽에 이르는 만만찮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이제 그 책이 영미권에서와 마찬가지로 세 권의 읽기 좋은 분량으로 새로 나왔다. 핵심에 좀더 집중할 수 있도록 사이드박스들이 많이 정리되었다.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편집하였다. 뿐만 아니라 총 세 권이 되면서 사실상 책 한 권 분량이 추가되었다. 세 권 합쳐서, <팀켈러의 센터처치>보다 386 페이지가 증가한 1186 페이지 분량이다. 그만큼 이번에 증보된 내용들은 알차기도 하고 보완적이기도 하다. 특별히 각 파트별로 추가된 여덟 개의 토론 글과 팀 켈러의 답변 글은 때로는 눈을 크게 뜨게도 하고, 때론 끄덕이게도 한다. 상당히 유익한 토론들이 본서에 대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여덟 번의 토론을 관전하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본 리뷰는 <복음으로 세우는 센터처치>, <도시를 품는 센터처치>,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에 흐르는 중요한 포인트를 짚음으로써 리뷰를 대신하려고 한다. 이 책들이 다루는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에 본인이 관심이 적은 분야는 건너뛰고 싶은 유혹이 독자에게 있을 것이다. 본 리뷰는 책의 세 축인 복음, 도시, 운동을 간략히 살피면서, 이 세 가지 기둥이 어떻게 연결되어 센터처치라는 큰 집을 짓는지를 보이려고 한다.
책 세 권을 한 문장씩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겠다.
1. 주님께서 우리에게 추수를 위해 심으라고 주신 씨앗이 ‘복음’이다.
2.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심어야 할 땅이 ‘도시’이다.
3. 복음 농경을 통해 열매를 거두고, 그 열매가 다시 씨앗이 되어 농사와 추수를 계속하는 교회가 하는 일이 ‘운동’이다.

1권 복음으로 세우는 센터처치- 양쪽의 도적들 사이에 선 십자가
<복음으로 세우는 센터처치>는 ‘복음’이 수백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또한 ‘복음’의 중심성을 되찾고자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강도들 사이에 못 박히셨는데, 예수님의 복음도 강도들 사이에 놓여 있다. 그 강도들은 한편으로는 도덕주의 또는 공로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데, 복음을 율법주의로 한정시키는 경향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주의 또는 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들인데, 복음을 율법폐기론으로 흐르게 하는 경향들이다.
율법 없는 은혜는 능력 없는 무책임을 낳고, 은혜 없는 율법은 구원의 능력이 없는 형식주의를 만든다. 제자도 없는 신앙인은 제자가 아니다. 결과 없는 신앙은 복음이 정당화하지 않는다. 복음은 복음의 결과들과 다르다. 복음의 결과들이 곧 복음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복음이 있으면 그 결과들이 계절을 따라 과실을 맺듯이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복음 자체는 충고가 아니다. 이렇게 살면 구원이 온다는 조언이 아니다. 복음 자체는 소식이다. 우리의 자원과 능력 바깥으로부터로 구원자가 오셨다는 소식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오셨고 순종하셨고 사랑하셨고 죽으셨다. 그분은 완전하신 하나님으로서 완전한 인간이 되셔서 율법의 완전한 요구를 다 이루셨다. 그분을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임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이 사람에게 유효하게 된다. 복음에는 율법과 은혜가 함께 있고, 칭의와 성화가 선명하게 이해되며, 구원의 근거와 구원의 결과가 설명된다. 복음 안에는 도덕주의는 없으되 도덕이 존중되고, 율법주의는 없으되 율법이 존중된다. 자유주의가 없으되 자유가 있고, 무책임이 없으되 사람을 해방한다.
마이클 호튼 및 데인 오틀런드와의 탁월한 토론을 통해 팀 켈러의 통찰은 더 빛이 난다. 복음은 결국 예수님과의 연합이며,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동행이다. 예수님의 몸이 되는 신자는 마음에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전으로서 이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체험한다. 복음은 성경 66권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며, 예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것이며,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들에서 – 일터, 가정, 학교, 사회, 교회- 하나님의 작은 성전들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어린 자녀들로 동행하는 것이고, 성령님의 능력이 없이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는 일상 속의 선교사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2권 도시를 품는 센터처치- 조각난 땅들에 뿌려지는 복음
<도시를 품는 센터처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한 노력의 이정표를 탁월하게 세우고 있다. 여기에서 도시는 복음이 심겨지는 땅을 의미한다. 그 땅을 도시라고 표현한 것은 도시가 사람이 밀집한 곳이 뿐만 아니라 조각나고 분절된 곳이 도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한국의 90%가 세계 기준으로 볼 때 도시화 되어 있다. 그런데, 도시의 특성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단순한 인구 밀집이 아니라 다양하고 다원화된 사람들이 섞여서 사는 곳이 도시이다. 초대교회가 인종, 국적, 문화, 언어, 신분, 남녀, 노소가 섞여있는 공동체였다. 안디옥 교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인이 모여서 지도층을 이루었다. 빌립보 교회에는 부유한 사업가인 여자 유대인, 가난하고 무학력인 어린 소녀 이방인, 그리고 중산층에 가정을 이루고 있는 하급 정부 관료인 로마인 간수가 첫 교인들이었다. 안디옥, 빌립보를 포함해서 사도바울의 선교여정은 당시의 각 도시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것이었다. 도시들은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섞이는 곳이다. 차이와 차별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도시는 뿌리가 다른 사람들이 이식되어 살아간다. 도시는 계층과 출신이 다른 사람들이 섞여 산다. 도시에는 가치관과 인생관이 다른 사람들이 뒤섞여 이웃으로 산다. 어떤 지역에는 특정 계층이 모여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연령대가 다르거나, 이주 연대가 다르거나, 준거 집단이 다르다면 그들은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도시는 단순히 인구밀도나 건축물이나 도시문화가 아니라, 다양하게 분절되고 조각난 파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도시화를 경험했거나 경험하고 있는 곳에서의 목회는 그렇지 않은 곳에서의 목회와 달라야 한다. 동일 문화, 동일 가치관, 동일 세계관, 동일한 라이프스타일이 있는 시대와 장소와는 달라져야 한다. 이는 마치 농사 짓는 땅이 변한 것과 같다. 기후변화가 일어나 온대가 아열대로 바뀌면 농사법이 달라져야 한다. 비가 안오거나 온도가 낮아지거나 일조량이 달라지면 농사법이 달라져야 한다. 이것이 상황화이다.
같은 진리의 씨를 심지만, 땅이 달라지므로 대처법이 달라진다. 농사 짓는 사람들이 부단히 땅을 연구하고, 기후변동에 대처해야 하는 까닭이다. 사람들이 수십 가지, 수백 가지 서로 소통이 안되는 각자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것을 위해서 소통을 연구하는 것이 곧 상황화이다. 팀 켈러가 말하듯, 진리 자체를 바꾸는 것은 상황화 신학의 폐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의 상황화는 땅에 대한 대처이다. 도시를 연구하고 도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해진다.
도시에는 기성 교회가 효과적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조각들이 계속 증가한다. 한국 교회의 평균 연령의 고령화는 이런 점에서 이해할 때 도움이 된다. 결혼보다 비혼을 선호하는 세대, 공동체에 대한 책무보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세대, 미래에 대한 투자보다 작지만 확실한 오늘의 행복을 중시하는 세대들이 증가하고 있다. 보상보다는 소통을 더 중시하는 세대, 충성보다는 의미를 더 중시하는 세대가 증가한다. 같은 연령대, 같은 직업군,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지만 사람들의 생각, 가치, 라이프스타일이 각각 다르다. 십인 십색을 넘어 천인천색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작업을 선구적으로 해온 팀 켈러 목사의 혜안이 북미와 유럽의 교회들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호주와 아프리카의 교회들에게도 적실한 통찰을 제공한다. 도시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단지 도심지에서 목회한다는 뜻이 아니라, 파편화되고 조각난 다양한 삶의 모자이크들 속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예수님께로 이끄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의 각자의 삶의 모자이크 조각을 뛰어 넘어 다른 조각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다가가 친구가 되고 신앙의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아픔과 의문과 고민에 대한 답이 되시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도시를 품는 센터처치>는 조각조각 파편화되는 사회 속으로 들어가서 소통하며 상황화하는 교회이다 (상황화). 빈부격차, 학력격차, 문화격차, 건강격차 등 다양한 격차가 있는 도시 속으로 들어가서 가난하고 힘 없고 약하고 외로운 이들을 섬기는 교회이다 (도시비전). 회사와 사업장과 각 일터에서 성도들이 생활 선교사로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그 고민을 같이 풀어가는 교회이다 (문화참여).
다니엘 스트레인지의 상황화에 대한 토론은 영국의 보수적 신학자 입장에서 팀 켈러의 상황화 접근법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재삼 느끼게 해준다. 다니엘 살귀에로의 도시비전 토론은 같은 뉴욕에서 목회하는 토론자의 기여를 통해서 우리의 도시 목회에 인종을 뛰어넘는 통찰을 제공한다. 앤디 크라우치의 문화 만들기에 대한 챕터는 탁월하게 문화 만들기의 사명이 하나님의 형상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다.

3권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 개인의 카리스마와 제도의 틀을 넘어서는 유기체적 조직체
지난 세기 후반부를 풍미한 교회성장운동의 특징이었던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통한 교회 성장 및 견고한 조직체를 통한 대형교회 성장 운동이 한계점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생산이 안일어난다는 것이다. 한 명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세워진 탁월했던 교회나 선교단체가 쇠퇴하거나 분열하거나 화석화되거나 사라지는 일들이 생기고 있다. 단지 후계 전략에 실패했다라고 보기에는 더 이슈가 있다. 그것은 성경적인 선교적 교회로서 자생력과 역동성이 있는 교회 모델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성경적인 교회가 되려는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핵심 DNA를 놓친다면 그것은 증상 기반의 대증치료에 머무는 우를 범할 것이다. 전도와 선교를 위한 수많은 예산과 프로그램과 활동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이 주중에 직장과 사회에서 생활선교사로 살기에 실패한다면 그 교회를 선교적 교회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열매를 맺는 것이 사역자의 부르심이라면, 우리는 그 열매가 단회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이기를 기대한다. 한 세대만 농사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 지속적으로 농사에 열매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나만 농사를 잘 지으면 된다는 겸손한 개교회주의를 뛰어넘어, 그 지역의 땅이 좋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센터처치 3부작의 마지막 책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운동성이 어떻게 확보되고 만들어지는지를 다룬다. 한 명의 지도자에게 의존하는 교회가 아니라 그 지역의 교회들이 함께 살아나고 그 도시의 복음 생태계가 살아나는 역동성에 대한 책이다.
이 책에서 ‘선교적 교회’는 성도들이 일상 생활 가운데 어떻게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보여주고 소통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자세히 다룬다. 특히 전도적 예배에 관한 챕터는 숙독하고 적용할 때 교회의 전도역동성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통합적인 사역’에 대한 챕터는 제자도의 통합성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좋다. 사역부서를 다양하게 많이 둔다는 의미 정도가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과, 사람들과, 도시와, 문화와 연결되고 소통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니 말이다. 그렇게 자신의 삶에 상황화되는 성도들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이 일어나고 복음 전파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 참여하라’ 챕터는 한국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개교회성을 극복하고, 어떻게 우리가 교회개척운동을 통해서 한국교회 생태계를 다시 살리며, 한국사회를 부흥케 할 수 있는지 귀한 통찰과 방향들이 제시되어 있다. 이는 단지 분립개척으로 귀결되는 이슈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개별적이고 유기체적인 역동성과 공동체적이고 조직적인 안정성이 만나는 교차로에서 어떻게 복음의 위대한 운동에 참여할 것인지 로드맵을 제시한다.
<센터처치>는 한 번 읽고 덮어둘 책이 아니다. 여러 번 정독하고 고민하고 토론하고 실행의 지침으로 삼을 책이다. 이제까지 이만한 책이 없었다. 대개의 목회 교과서는 너무 이론적이거나 아니면 너무 실무적이었다. 이론 중심적인 책들은 목회 현장에 연결하기에는 너무 하늘 높이 있었다. 실무 중심적인 책들은 현장이 달라지면 적용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너무나 다른 땅에 있었던 것이다. 본 리뷰에서 살펴보는 책들은 바로 이러한 갭을 메꾸는 책이다. 현장에 천착한 독자들에게는 목회에 대한 조직신학, 성경신학, 실천신학적 조망을 선사할 것이다. 이론에서 출발하는 독자들에게는 현장으로 안착하기에 필요한 징검다리를 제공할 것이다.
교회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라. 교회를 고민하는 크리스천 지도자라면 이 책을 읽으라. 목회를 고민하는 목회자라면 이 책을 집어 들라. 교회를 교회답게 하기 원하는 목회자 후보생이라면 이 책을 집어 들라. 그리고 완독하도록 하라. 여러 번 읽어서 자기 것으로 소화하라. 여러 번 읽으면서 내 것으로 만들어라. 주변의 동지들과 함께 읽으면서 토론하라. 교회의 고민을 목회 현장에서 이 책과 함께 풀어가라. 아프리카 속담처럼, 혼자 가면 빨리는 갈 수 있지만,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 목회의 결승점까지 완주하기 위해 이 책을 읽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토론하는 친구들을 만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