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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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소그룹운동의 장점과 단점

작성자
newcity church newcity church
작성일
2018-10-17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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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1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소그룹운동의 장점과 단점

오종향

I.도입
    A. 이슈의 배경
최근 미국, 한국을 위시한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교회의 소그룹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소그룹 운동이 새삼 이 시대에 대두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 많은 목회자들이 소그룹 운동에 관심을 고조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것은 한 마디로 기존 목회 패러다임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위기의식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김순성 2007). 하워드 스나이더는 기존의 건물 중심의 제도화된 교회 구조와 목사 중심의 목회 구조가 성령을 소멸하는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스나이더 2002). 그는 건물 중심적, 목사 중심적 사역구조가 이동성 결여, 교제 결여, 목회자의 교만, 비인격적 계층 조장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뿐만 아니라, 목회성공을 지향하는 능력 있는 수퍼스타 목회자 중심의 교회구조에서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몸이 아니라, 청중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스나이더 2002). 이러한 비판은 생소한 것은 아니다. 2005년 한미준과 한국갤럽이 공동 조사한 결과는 이러한 현상을 입증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 주일 대예배 한번만 드리는 사람은 55.1%로 절반이 넘고, 평신도가 평신도를 가르쳐본 경험은 삼분의 일 밖에 안된다. 성경을 전혀 읽지 않는 교인도 53%나 되었고, 하루에 10분 이상 성경을 읽는 교인은 20%에 불과했다. 65%의 사람들은 예배와 설교에 의존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갤럽 2005).
또한 이는 프로그램과 이벤트 중심의 목회 패러다임의 한계이기도 하다. 랄프 네이버는 프로그램 중심의 전통교회 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다섯 가지 비효율적 측면을 분석한다. (1) 교회건물이 일주일에 단 몇 시간을 제외하면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 (2) 목사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을 계발하기 위해 교인들을 섬긴다는 점, (3) 프로그램 중심 교회에서 봉사에 참여한다는 봉사하는 교인들이 너무 적다는 점, (4) 교회의 몸을 이루는 일에 적극 참여하지 못하고 봉사활동에 태만한 교인들이 너무 많이 존재한다는 점, (5) 전도 대상인 불신 공동체와는 사실상 접촉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네이버 1999).
현재 소그룹운동에 대한 높은 관심은 공동체성이 희박해져 가는 시대 속에서 참된 공동체의 소속감과 능력을 향한 갈망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지난 수 세기 동안 교회들이 가졌던 특성인 본질적인 공동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소그룹 운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성경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들을 우리의 생활 속에 속속들이 적용시켜 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작은 규모의 소그룹에서 같이 공부하는 것인데 (니콜라스 1986), 현대 교회에서 소그룹의 장점을 재발견하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B. 소그룹 운동의 현황
한국 교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전도회, 청년회 등의 기관별 모임과 구역모임을 통해 이러한 요구를 충족해 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관은 행사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구역은 예배와 단순 친교 중심으로 치중되어 진행되었다. 따라서 각 기관과 구역 모임을 통해 신앙양육과 돌봄과 상담과 권면이 약하다는 것이 지적되어 왔다. 결국 제도는 갖추었으되 내실 없는 기존의 모임 대신 실질적인 내용을 갖춘 새로운 소그룹 운동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흐름은 다음의 네 가지로 묶어 볼 수 있다.
(1) 가장 일반적인 것은 교회 내에서 소그룹 모임을 활성화하는 흐름이다. 서울 사랑의교회가 제자훈련을 하고 그를 통해 기른 “순장”들을 “다락방”으로 파송하여 가정에서 소그룹 모임을 하게 하는 것이 그 흐름에 속한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구역모임이나 감리교의 속회 등도 이에 속한다. 많은 교회의 셀그룹이 이와 같은 제도이다. 이는 소그룹운동이라기보다는 제자훈련 운동 및 은사주의적 교회성장운동으로 각각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의 논의에서 제외한다.
(2) 최근 10년 동안 휴스턴 서울교회 최영기 목사가 이끌고 있는 “가정교회” 운동이 많은 미국 이민 교회들과 한국의 여러 교회들에 도입이 되었다. 이 흐름은 하나의 지역교회 안에 여러 개의 가정교회를 일으키는 운동으로 교회의 가족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으로 볼 수 있다. 가정교회 운동은 구역모임을 가정교회로 변화시키라고 주장한다 (최영기 1996). 본 논문은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다룬다.
(3) 셀교회 운동과 더불어 최근의 셀교회운동인 G-12, D-12 등이 중요한 흐름을 형성한다. G-12는 아울러 싱가포르, 콜롬비아, 카작스탄 등에서 부상하여 미국과 한국에 역수출된 것으로서 은사운동을 기반으로 한 소그룹 운동이다(김삼성 2003). D-12는 예장합동에 속한 풍성한 교회에서 시작된 것으로 말씀공부 중심의 선교단체 성경공부와 양육 시스템을 종합하여 교회 내로 도입한 것이다(김성곤 2001). 이 부분은 가정교회를 주로 다루면서 필요한 때에 다루도록 한다. 가정교회와 G-12와 D-12는 상이한 운영방식과 양육프로그램의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분가와 증식을 목표로 하는 교회성장 추구형 소그룹 운동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4) 초소형 교회 (micro church) 운동도 미국에는 꽤 세력을 형성한 듯 하다. 이는 앞의 세 가지 흐름과는 달리, 교회의 울타리 밖에서, 건물과 제도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초소형교회 운동이다. 열 명 안팎에서 몇 십 명까지 모이는 가정교회들로서 미국과 캐나다에는 적어도 수만 개의 초소형 교회가 미국과 캐나다에 있다고 한다 (스나이더 2006; 콜 2006). 바나 그룹(Barna Group)의 2006년 조사에 의하면 미국 성인의 9%가 매주 가정교회에 참석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초소형교회운동은 아래에서 살펴 볼 성경적인 개혁주의 신학에 하등 부합하지 않으므로, 또한 한국 교회에서는 미약한 움직임이므로 본 논문이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C. 문제 제기
이러한 흐름들은 우리가 대응해야 할 중요한 이슈를 개혁주의 교회에 제기한다. 과연 개혁주의적 교회론은 소그룹 운동에 대해 어떤 관점을 제시하는가? 대치적 관계인가, 아니면 수용적 관계에 있는가? 소그룹 운동은 성경적인 근거와 타당성을 갖고 있는가? 소그룹 운동은 바람직한 목회의 대안이 될 것인가? 개혁주의적 소그룹운동은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이슈에 답하기 위하여 본 논문은 먼저 개혁주의적 교회론을 살피고, 소그룹에 대한 성경적인 토대를 먼저 확인한다. 그 후에 가정교회 운동의 장단점을 기술할 것이다.

 

II.개혁주의적 교회론과 소그룹 사역 개혁주의 신학은, 조나단 에드워즈와 게할더스 보스, 그리고 리차드 개핀이 그렇게 한 것처럼, 성경 전체의 이야기인 구속사적 흐름을 반영해야 한다 (Lints 1993). 개혁주의 신학에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예표이다. 교회가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가 교회를 통해 구현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총합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영적 이스라엘로서 새로운 영적 단위이다. 이스라엘이 열 두 지파로 구성되고, 예수께서 열두 사도를 세우신 것은 구원의 언약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과 교회의 충만성을 표현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클라우니는 구속사적 관점의 개혁주의 이해에 충실하게 교회의 기능을 성전론으로 설명한다. 즉,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성전의 기능은 끝났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이 일 때문에 이제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성도들이 “신령한 집으로 지어지는 산 돌이요, 황소나 양이나 향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입술과 삶의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들이다” (벧전 2:4-5; 히 13:15-16)” . (클라우니 1999)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곧 성전이며, 교회인 것이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교회론은 성경의 주안점이다. 구약 성경의 많은 부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의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신약 성경의 대부분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형성된 성령의 새로운 공동체를 강조한다. 그러나 복음주의 신학은 종종 이러한 성경적 강조점을 놓치곤 한다” (스나이더 2006) .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아래에서는 교회의 모습을 다루고 특히 소그룹에 관련성이 있는 것을 다룬다.
A. 교회의 정의
개혁주의의 교회 정의는 단순히 “공동체 곧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된 자들, 그리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이다.” (벌코프 1991) 루터와 칼빈을 통한 종교개혁은 외형적인 제도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성도의 무리에서 교회의 본질을 발견해야 한다는 진리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벌코프 1991). 그래서 벨직 신앙고백은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기대하며, 그의 피로 씻김을 받고, 성령으로 성화되고, 인침을 받은 참된 신자들의 회중인 한 보편교회 혹은 우주적 교회를 믿고 고백한다.” 참된 신자들의 거룩한 모임이 곧 보편적 교회라는 고백이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무형의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서 하나로 모였고 모이고 있으며 또 모이게 될 택함을 받은 모든 자들로 구성된다. 또한 이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배우자이며 몸이며 충만이다.” (25장) 라고 고백함으로써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의 총수를 교회로 보는 관점을 지지한다. 벌코프의 요약에 의하면, “무형교회는 하나님이 보시는 교회로서 신자들만을 포함하는 교회인 반면, 유형 교회는 인간이 보는 교회로서 자녀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리함으로써 성도들의 공동체로 간주되는 교회이다 .” (벌코프 1991). 한편, 벨직 신앙고백은 “모든 성도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 있는 ‘지역 교회’에 속해야 하며 그 교회의 가르침과 치리를 받아야 한다”고 (벨직 신앙고백 28조) 명시한다.

B.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
무형적, 유형적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예표한다. 클라우니는 교회를 개혁주의의 전통에 충실하게 하나님 나라의 징표로 이해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될 수는 없으나, 교회는 “성령님을 통하여 이미 현존하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종국적으로 임할 그 나라의 증표”이다 (클라우니 1999).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한다. 성경적인 하나님 나라와 교회 이해에 근거해서 클라우니는 구약의 하나님 백성으로부터 시작하여 교회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그 교회가 하나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님과의 교제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클라우니 1999)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후사가 된다. 그리스도에게 연합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언약의 성취를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이 된다(갈 3:29; 4:21; 롬 15:8). 이와 같은 논의에 근거하여 클라우니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거듭난 개인이 아니라 한 가족이요, ‘영적인 종족’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다 ”. 이와 같은 교회는 다른 사회 기관과 달리 구성원들의 자의에 의해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족장적 가족과 언약의 나라처럼 하나님이 만드시는 기본구조이다 (이승구 2006). 그러므로 개혁교회는 언약에서 출발한다. 말씀은 언약을 선포하고, 세례와 성찬은 언약의 표지이다. 목회는 언약이 지닌 공동체 정신의 구현을 목표로 삼는다 (유해무 2007).

C. 교회 사역의 세 본질
i. 기독론적 접근
기독론을 성경적으로 교회론에 적용하여 접근할 때 우리는 교회 사역의 본질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반석으로 하여 세우신다 (마 16:18). 교회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성령의 역사 가운데 몸된 교회를 충만케 하신다 (엡 1:22; 4:10-11). 개혁주의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완성의 맥락 아래 교회 사역의 본질을 볼 수 있게 한다(Torrance 1955; Bannerman 1960). 개혁주의 교회론은 그리스도의 삼중 직분 (제사장, 선지자, 왕)을 다루고, 그 직분들이 기독론적 교회론의 의미에서 교회사역의 세 본질은 그리스도의 이 세 가지 직분을 수행하는 것임을 제시한다 (Graham 1999; Graham 2007).
구약에서 기름 부음을 받는 직분은 세 가지가 있었다. 제사장 (출 28:41; 출 40:15; 레 16:32; 삼상 2:35), 선지자 (왕상 19:16; 대상 16:22; 사 61:1), 왕 (삼상 2:10; 삼상 10:1; 삼상 16:1; 삼상 24:10; 왕상 1:45; 단 9:25)의 세 가지 직분이었다.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은 실질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하나님이 기름 부으셔서 세워지는 세 직분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야로 오셔서 이 세 가지 직분을 궁극적으로 완성하셨다 (눅 4:18).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의 선포를 맡은 선지자 직분을 궁극적으로 완성하신 선지자이시며 (신 18:15; 눅 13:13; 눅 24:19; 요 4:44; 행 3:22; 행 7:37; 히 1:1-2), 하나님께 나아가는 회개와 용서의 통로를 맡은 제사장 직분을 궁극적으로 완성하신 제사장이시며 (히 2:17; 히 4:14; 히 5:10),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고 백성을 보호하고 신정언약 공동체를 운영하는 왕의 직분을 궁극적으로 완성하신 왕이시다 (마 21:5; 요 19:19-20; 딤전 6:15; 계 19:16).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 (고전 1:30), 이는 각각 말씀을 맡은 ‘선지자’로서의 직분에 있어서는 ‘지혜’가 되신 것이고, 의롭고 공평하며 책임 있는 통치를 맡은 ‘왕’의 직분에 있어서는 ‘의로움’이 되신 것이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 회개하고 회복하게 하는 ‘제사장’의 사역에 있어서는 ‘거룩함’이 되신 것이다.
이러한 기독론적 관점을 교회론의 목회 본질에 적용할 때 사도들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궁극적으로 수행하실 뿐 아니라 완성하신 이 세 가지 직분 안에서 계승하는 것이다. 즉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리라고 하였을 때 (행 6:4), 사도들은 선지자 직분으로서 복음 말씀의 전파와 제사장 직분으로서 중보와 기도의 사역을 의미하였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이 집사들을 세워서, 교회 내의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들 간의 구제 형평성이라는 공동체 문제를 해결하게끔 한 것은 왕의 사역, 즉 보호하고, 난관을 해결하고, 공동체 리더를 세우는 사역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목회의 목표라고 볼 수 있는 마태복음 28:19-20의 지상명령의 이해에 도움을 제공한다. 즉 ‘가서 제자를 삼’는 것은 지상명령의 본질로 선교와 제자화를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바 그 내용이 되는 것은 목회의 세 본질로서 구성된다. “가라 그리고 제자 삼으라”가 동사로 되어 있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에서 세례를 준다는 것은 분사로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의 가르치는 것도 분사로 되어 있다. “지키게 하라”는 부정사로 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제사장 직분의 사역이 세례를 주는 사역으로 표현되고, 선지자 직분의 사역이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으로, 그리고 왕 직분의 사역은 그 말씀을 지키게 하는 사역으로 표현됨을 볼 수 있다.

ii. 세례의 사역
‘세례를 주는 사역’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일어나는 사역이며,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사역이다 (Nevin 1846; Holifield 1976; 칼빈 1996). 다시 말하면 세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몸 속으로 연합되는 첫 번째 성례이며,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어받는 지속적인 성례이다. 칼빈은 성찬에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임재한다고 정확히 고찰하였다. 즉, 지상명령에서 세례의 사역은 공동체적로는 몸의 한 지체가 되는 것이면서, 성도로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하고 또한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는 사역인 것이다. 칼빈의 고찰과 연결한다면, 세례의 사역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오도록 이끌어주는 중재적 사역, 곧 제사장적 사역인 것이다 (Graham 2007). 이는 폭넓게 보면 사도행전 6장 4절에서 말하는 바 ‘기도의 사역’에 해당한다. 기도는 본질상 하나님의 영적 임재 가운데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iii. 말씀의 사역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곧 구약에서 증거하고 복음서에서 확증되고 신약의 다른 책들에서 성령이 계시한 모든 예수님에 대하여 선포하고 가르치는 사역이다(Miller 1824; Dabney 1870; Sayers 1947; Horton 1998). 예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이 되신다. 예수님은 일부의 말씀이 아니라, 모든 말씀을 가르치라고 하셨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말씀을 전도하거나 설교할 때에 그 내용은 30번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선포함을 볼 수 있다. 특별히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임을 선포한 것이 사도들의 설교 주 내용이었을 것이다 (눅 24:27; 요 5:39). 이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 스데반, 바울의 설교를 볼 때에도 명확하다. 그러므로 참된 말씀의 사역은 반드시 복음의 사역이다. 참된 말씀의 사역은 순수한 복음의 사역이며, 이는 구원 얻게 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교리를 온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벗어나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리에서 벗어난 설교는 순전한 말씀 사역이라 할 수 없다. 또한 가르치라고 말할 때 이는 공예배에서의 설교와 사적인 모임을 망라해서 (행 20:20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예배 시간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딤후 4:2 “때를 얻는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말한다.

iv. 공동체의 사역
‘말씀을 지키게 하는 사역’은 들은 말씀을 지키게끔 하는 사역이다. 어떻게 말씀을 주중과 일상 속에서 지키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공동체적 방편을 의미한다. 지역 교회의 구성원들이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권면하고 격려하는 것은 오직 작은 규모의 지속적이고 책임성 있는 언약관계의 공동체를 통해서 가능하다 (Bucer 1538; Dabney 1967; Torrance 1984). 그 규모를 성경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래 예수님과 소그룹 사역을 논하는 곳에서 살펴볼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성도들을 양육해야 할지를 암묵적으로 알았으리라 유추할 수 있다. 예수께서 친히 서너 명의 제자들, 열두 명의 제자들, 칠십 명의 제자들, 오백 명의 제자들과 동심원적인 관계성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서로 말씀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말씀을 지키게 하는 사역은 목양의 사역이며, 성도들을 악한 원수로부터 보호하는 사역이며, 성도들이 바르게 성장하며 사역할 있도록 공동체를 만드는 사역이다.
이상과 같이 기름부음 받으신 예수님의 교회 관련 세 직분을 살펴보고, 사도행전 6장과 마태복음 28장에서 간단하게 살펴본 것처럼, 교회 사역의 세 본질은 말씀의 사역과 세례의 사역과 공동체의 사역이라고 볼 수 있다. 말씀의 사역은 순수한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이고, 세례의 사역은 성례전을 비롯해서 참된 기도를 통하여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게 하는 사역이며, 공동체의 사역은 이러한 말씀과 세례의 사역이 합당하게 일어나도록 성도들을 위한 영적인 공간을 만들고, 양육하고, 다스리고, 악을 치리하는 공동체의 사역이다. 이 세 본질은 각기 별개의 것일 수 없고, 세 가지가 반드시 함께 있어야만 정상적이고 유효한 구체적인 모형을 산출할 수 있다. 이 중에 한 가지나 두 가지를 등한히 하고 하나만 선택한다면 그 목회 모델은 교회의 본질을 상실하게 된다. 예수께서 제시하시고, 사도들이 따른 이 세 가지는 교회사역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지, 구체적인 목회 방법론이나 사역의 모델을 적시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구체적 방법론이 아니라 목회의 원리적 본질을 제시한 것은 깊은 뜻이 있다.
D. 참 교회의 표지
이제 참 교회의 표지에 대해 논할 시점이 되었다. 교회의 표지는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벌코프 1991). 개혁 신학에 있어서 교회의 표지의 수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순수한 복음적인 교리의 전파만이 교회의 표지라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지만 (베자), 말씀의 순수한 전파와 성례의 바른 시행이라고 본 견해도 있었다 (칼빈, 카이퍼). 또 여기에 신실한 권징의 시행을 첨가하기도 한다. 벌코프는 이 세 가지 모두가 교회의 표지에 해당한다고 본다 (벌코프 1991). 칼빈은 순수한 복음 말씀과 바른 성례의 실행이라는 두 표지를 강조하였지만 , 기독교강요의 뒷부분에 가면 바른 권징의 사용을 강조한다. 벨직 신앙고백도 이 세 가지를 교회의 표지로 본다. “우리는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해야 하는데, 참 교회의 표지는 복음의 순수한 전파와 성례의 순수한 거행과 권징의 시행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따라 시행되어야 한다 (벨직신앙고백 29조)”. 이와 같이 개혁주의 교회관은 이 세 가지를 참된 교회의 표지로 봄에 있어서 일관성 있는 관점을 취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 목회의 세 본질에 비춰보면, 칼빈과 개혁주의에서 고찰하는 참된 교회의 세 표지가 상당히 일치함을 볼 수 있다. 순수한 복음 말씀의 전파는 ‘말씀의 사역’에 해당한다. 바른 성례의 집례는 두말 할 것 없이 ‘세례의 사역’에 해당한다. 바른 권징의 사용은 양육과 치리의 동전의 양면으로서 ‘공동체의 사역’에 해당한다. 즉, 목회의 본질이 제대로 구현되고 있느냐가 참 교회의 표지를 정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에 논할 바 목사 및 장로의 직분이 어떻게 구현되느냐가 중요하다.
E. 목사의 직분
교회의 표지와 아울러 중요한 것이 그 표지를 실행하는 직분자이다. 교회에는 직분자들이 있어야 한다. 곧, 하나님 말씀의 수종자, 장로와 집사들인데 이들은 교회에 의해 적법한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야 한다 (벨직 신앙고백 제31조). 즉 개혁주의 교회관은 성도들이 모였다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님을 천명한다 (변종길 2007). 칼빈 또한 “그리스도의 일군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고전 4:1)라는 성경말씀과 “감독은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딛 1:9)해야 한다는 본문으로부터 복음을 설교하고 성례를 집전하는 목사의 직분을 증명한다(4,3,6; 4,15,20 참고). 칼빈이 직분, 특히 목사직으로부터 교회의 표지를 제시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씀의 순수한 직분과 성례를 집례하는 순수한 방식은 이것들이 지닌 교제를 안전하게 교회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보증이다(4,1,12). 열쇠권도 목사의 직분으로서 복음의 설교나 성례의 집례를 통해 교회 고유의 은덕을 나눈다(4,1,22). 이와 같이 칼빈은 목사직을 높이 평가한다. 목사직에 교회가 존재하며, 가히 의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해무 2007).
목사직이 중요한 것은 그가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기 때문이다. 벌코프에 있어서도, 모든 것은 말씀으로 귀결되는데, “말씀을 참되게 선포하고 그것을 교리와 삶의 표준으로 인식하는 것이 교회의 유일한 표지이다” 라고 주장한다 (벌코프 1991). 클라우니는 “언어 계시의 객관적 권위가 일단 상대화되면 성경이 아닌 교회가 진리의 궁극적 기준이 된다”고 예리하게 지적한다 (클라우니 1999). 말씀의 권위가 약화되기 시작하면 교회의 권위가 기준이 되든지 또는 교회의 스타일이나 브랜드가 기준이 되고 만다. 교회가 성경을 굳게 잡을 때만, 즉 교회가 말씀의 공동체가 될 때에만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된다. 교회가 교회의 주인이신 분께 신실하려면 교회는 먼저 교회를 향한 그 분의 뜻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교회는 “교회를 세운 사역은 말씀의 사역이다(엡 4:11)” (클라우니 1999)는 말씀을 귀 기울여야 한다.
F. 장로의 직분
목사의 직분과 함께 중요한 것이 장로의 직분이다. 칼빈은 중세에 사라져버린 장로직분을 회복한 바 있다. 칼빈은 장로의 직분은 말씀사역을 통한 목양이라고 명시를 한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건전한 교리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감독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는 것은 교회의 오랜 원칙이었다” (기독교 강요 4.4.3.). ‘다스리는 일’(고전 12:28)을 맡은 장로는 ‘부지런함으로’(롬 12:8) 다스려야 한다(기독교강요 4.3.8). “칼빈의 이런 입장을 따라 개혁교회는 지역을 구분하여 구역을 편성하였다. … 구역 장로는 수시로 자기 구역에 속한 교인들이 성경과 신조를 따라 살아가는지를 살핀다. 매년 인접한 구역 장로와 협력하여 정기 심방을 하면서 정식으로 신앙생활을 살피고 권면하고 함께 기도한다. 목사의 설교로부터 부부 관계나 자녀 교육까지 삶을 전반적으로 살핀다. … 목사와 장로는 협력하여 함께 ‘목회’한다.” (유해무 2007).
장로 직분을 이렇게 기술함은 다스림과 목양의 두 기능을 합한 것이다. 벌코프는 말하듯이, “장로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떼들을 돌보았다. 그들은 양떼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식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그들을 다스리며 보호해야만 했다” (벌코프 1991). 이것은 주로 ‘치리’를 위주로 하는 현대의 장로상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또 특정교회들에서 유행하는 것처럼 ‘사역’을 위주로 하는 장로의 모습과도 다르다. 또 ‘권징’ 권한이 없이 목양만 하는 것도 아니다. 칼빈을 비롯해서 개혁주의 교리는, 성경의 정신에 합당하게, 장로의 역할은 말씀으로써 덕을 세우는 목양이며, 의사처럼 교회의 병을 고치는 치유라고 가르친다. 성경에서도 장로(감독)는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딤전 2:2). 장로의 주된 임무가 ‘양을 치는 것’인데 양을 치는 일이 곧 양을 먹이는 것이다(행 20:28, 벧전 5:2, 요 21:15-17). 곧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는 양을 치는 자로서 가르치기를 잘 해야 한다 (변종길 2007).
G. 권징의 위치
목사의 사역, 장로의 목양이 공동체적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날 때 그것을 권징이라고 한다. 권징은 목양이 핵심이다. 칼빈은 교회 권징의 필요성과 성격에 대하여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교리를 전하기만 하고, 사적인 충고와 시정과 기타 보조 수단을 첨가해서 교리를 지탱하며 실천하게 하지 않는다면 각 사람이 제멋대로 행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4.12.1.). 즉 공예배에서의 말씀의 전파와 성례의 집례 외에 비공식적인 모임과 면담을 통해 성도들이 참으로 진리에 따라 살도록 지도해야 한다. 칼빈은 이어서 교회 권징의 단계에 대해 기록하면서 “권징의 첫 기초는 사적인 충고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는 것이다. … 목사와 장로들의 임무는 신자들에게 설교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교훈으로 충분한 성과가 없을 때에는 각 가정에 다니면서 경고와 충고를 하는 것이다” (4.12.2.)라고 기록하였다.
벌코프는 권징이 “교리를 순수하게 지키고 성례의 거룩성을 수호하기 위해 절대 필요하다”고 명시한다 (벌코프 1991). 그는 권징에는 이중적인 목적이 있음을 밝힌다. 첫째로 “그것은 회원을 받아들이는 것과 축출하는 것에 관한 그리스도의 법을 실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둘째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는 것을 보장함으로써 교회의 회원들의 영적인 덕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벌코프 1991). 즉, 권징은, 칼빈이 말했듯이, “온화하고 아버지 같은 태도로” (4.12.6) 죄인을 회개하고 바르게 인도하기 위하여 해야 하는 것이다. 권징은 보복을 가하는 징벌이 아니라, 악영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회개로 이끌어 결국 당사자를 회복시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살후 3:15) (빌지키언 1998). 이는 앞에서 살펴본 목회의 세 본질에 있어서 ‘공동체의 사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H. 개혁주의에서 소그룹의 위치
우리는 개혁주의 교회에서 소그룹의 위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고찰을 신학과 역사로부터 할 수 있다.
i. 벌코프
개혁주의 교회론에서 교회는 무형교회와 유형교회의 구분뿐 아니라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 (제도)로서의 교회”도 구분이 된다. 벌코프는 신자들의 모임인 유기체적 교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교회가 오직 그분 말씀과 성례의 시행 그리고 일정한 형식의 교회 정치 안에서만 가시적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없을지라도 교회는 여전히 공동 생활과 신자들의 고백 안에서, 그리고 그들이 연합하여 세상을 대항하는 가운데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성령의 끈으로 연합된 신자들의 공동체인 반면,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신자들의 어머니로서 구원의 방편이요, 죄인들을 개종시키고 성도들을 완전케 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영적 능력이 있는 교회이다. 그 안에서 모든 유형의 은사들과 재능들이 나타나고 주님의 사업을 위하여 사용된다. 반면에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직분들과 방편들을 통하여 제도적 형식과 기능들로 나타난다 .” (벌코프 1991) (강조체는 추가한 것임)
벌코프는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 (제도)로서의 교회를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았다. 교차하는 것으로 보았다. 벌코프는 말씀과 성례의 시행과 일정한 교회정치의 틀 없이도 유기체적인 교회가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들은 성령의 띠로 연결된 성도들의 모임이며, 그 모임 안에서 모든 은사들과 재능들이 나타나고, 주님의 사역들이 일어난다고 본 것이다. 이는 교회의 공예배와 공식 정치조직에 국한되지 않는 소그룹의 존재와 잠재력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ii. 칼빈
칼빈에게 있어 공적 예배와 사적인 목양은 모두 중요했다. 먼저, 칼빈은 공예배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나님께서는 일순간에 그의 백성을 완전하게 만드실 수 있지만, 그들이 교회에서 교육을 받음으로써 장성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 신자들에게는 공중예배보다 더 큰 도움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예배에 의해서 자기의 백성을 점진적으로 향상시키신다.” (칼빈 1996). 공적 예배의 중요성은 절대로 간과될 수 없다. 그러나 칼빈이 공예배만 강조한 것은 아니다. 모임목양자로서의 장로의 직분과 치유하고 회복하는 목적으로서의 권징의 원칙을 살펴볼 때, 칼빈이 사적인 모임과 소규모 가정모임을 장로들에게 장려했음을 우리는 명백히 볼 수 있다. 칼빈이 현대적인 소그룹 운동을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칼빈은 목양과 장로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비공식적인 양육 환경의 중요성을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iii. 마틴 루터
루터는 전도회 (Evangelical Order) 형태의 비공식 예배모임을 주창한 바 있다 . 그는 전도회 소그룹모임을 통해 기독교의 품덕에 합당하게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책망을 받고 교정되고 파문을 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루터가 가정에서 모이는 소그룹 모임을 의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회 내의 소그룹 모임으로서, 언약을 맺고 들어오는 그룹이며, 가정에서 모이며, 신앙에 대한 상호 책임과 훈련을 실시하며, 전도적 활동을 수행하는 그룹으로 주창되었다. 그러나 루터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실행하지는 않았다. 루터는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았으며, 동역자가 없다는 이유를 거론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독일의 스펜서가 경건주의적 소그룹 운동을 일으키는데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Bunton 2001).
iv. 마틴 부처
칼빈보다 18살 연장자이며 칼빈의 동역자였던 마틴 부처는 참된 교회의 실현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마틴 부처는 참된 교회가 가시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교회 안에는 선한 자와 악한 자가 함께 모여 있을 수 밖에 없다는 현실적 인식을 했다. 그는 1523년에 “That a Man Ought Not to Live for Himself, but for his Neighbor – and He can Reach the Ideal”이라는 논문을 썼다. 이 논문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적 삶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부처는 소그룹이 제2의 종교개혁이라는 주장을 했다. 즉 기독교 공동체 (christliche Gemeinschaften (Christian communities))를 주창했다. 그는 경건을 훈련하는 이러한 소그룹 제도야말로 교회에 안정과 일치를 가져오는 방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부처의 이러한 개혁은 씨앗만 뿌린 채 열매를 보지 못하고 묻히고 말았다 (Bunton 2001).
v. 청교도
16세기와 17세기의 청교도들은 conventicle (컨벤티클, 사적 집회) 이라고 불리는 소그룹 모임을 가졌다. 이는 목사 또는 경험 있는 신자와 함께 모이는 가정 집회였다. 당시 영국 국교회의 예배로 부족하다고 느꼈던 청교도들은 예배 후나 주중에 가정집에서 모여서 경건회를 가지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어, 미국의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청교도 목사인 커튼 메이더 (Cotton Mather) 목사의 교회에는 13-14개의 컨벤티클이 있었고, 각각 12명 정도씩 모였다고 한다. 그들은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설교를 읽고, 경건일기를 낭독하기도 하였다. 영국에서는 리처드 백스터 (Richard Baxter)가 이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그는 가정 모임들에 대해서 말하면서 모든 설교 사역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쓰기도 했다. 청교도 모임들의 특징은 지역 교회 안에 있는 소그룹 모임이었다는 점이다 (Bunton 2001).
vi. 화란 개혁교회
화란의 개혁교회 안에서 경건주의적 동기를 갖고 있었던 이들은 소그룹 모임이 개인의 경건을 고무하는데 효과적임을 확신했다. 예를 들어 야도쿠스 반 로덴스턴 (Jadocus van Lodensteyn, 1620-1677)은 교회생활의 개혁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소그룹으로 모여서 실천적 신앙을 고무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장 드 라바디 (Jean de Labadie, 1610-1674)는 The Reformation of the Church by the Pastorate (1667)이라는 저술에서 주장하기를, 소그룹을 세우는 것이 목사의 중요직무 중 하나라고까지 하였다. 화란에서 소그룹은 콜레지아 (collegia)라고 불렸으며, 이들은 보통 목사에 의해 주재되고, 찬양, 성경읽기, 성경에 대한 토론, 설교에 대한 토론, 기도 등을 했다. 콜레지아는 또한 교제 (코이노니아)도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화란 개혁교회 안에서 일어난 이 흐름은 후대에 독자적이고 분리적인 경건주의 운동이 되고 말았다 (Bunton 2001).

요컨대, 소그룹은 개혁교회 내에서 이론적, 역사적으로 타당한 자리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 개혁주의에서 소그룹의 특징은 세 가지이다. 첫째, 소그룹은 어디까지나 공예배를 보조하는 위치에 속한다. 즉, 공예배를 통해서 전수받은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제대로 적용하고, 실천하며 살도록 격려하고, 확인하고, 바르게 하고, 책망하고, 의로 교육하는 목적인 것이다. 공예배 없이는 소그룹도 없는 것이다. 말씀 사역자의 말씀 선포와 성례 없이는 소그룹도 없는 것이다. 둘째, 개혁주의 교회 내에서 소그룹의 위치는 목사와 장로의 사역의 장으로서 기능을 했다. 목사와 장로가 각 가정을 돌면서 심방을 한다든지, 신앙교육을 한다든지 하는 사적인 모임의 자리로 자리를 매김했다. 교회의 표지에서 권징의 핵심은 치유이며, 회복이며, 양육이다. 공적 회의의 치리를 통한 처분은 최종적인 것이었으며, 일차적인 수단은 양육에 의한 교정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셋째, 개혁주의 교회에서 소그룹 운동은 말씀이 중심 되는 자리였다. 말씀사역이 중심이 되어 성도들을 그리스도께로 더욱 이끌며,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며, 신앙의 덕을 육성하는 자리였다. 인간끼리의 친교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교가 말씀의 나눔을 통해 일어나는 자리였다. 이에 반하여 근래 유행하는 소그룹 운동들은 마치 개혁주의가 소그룹의 유용성을 배척하거나 소그룹 사역을 배제하는 듯이 오도하는 듯 하다. 그러나 위와 같이 개혁주의의 신학 관점들을 살펴볼 때, 워낙 바른 말씀의 사역이 중요한 나머지 소그룹의 활용 등에 대해 지면을 덜 할애했을 뿐, 바른 말씀 사역이 일어나는 곳에는 참된 소그룹 사역이 있었음은 자명한 일이라 하겠다.
이제 이러한 이해를 기초로 하여 신약 성경에서 소그룹 모임을 어떻게 기술하였는지를 직접 살피자. 개혁주의의 모든 신학은 성경에서 나온다. 우리는 교회에 관한 일반적인 관찰에서, 소그룹에 대한 구체적인 성경관찰로 시선을 옮긴다.

III.신약성경의 소그룹 사역 A. 예수님의 소그룹 사역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셨는데, 중요한 것은 소그룹 규모로 모였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부르셔서 소그룹으로 함께 거하셨다 (막 3:14). 예수님은 열두 명의 제자들과 소그룹을 이루어 삼 년 동안 함께 사셨다. 예수께서는 특별히 서너 명의 제자들과 소그룹을 가지셨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막 5:37), 높은 산에서 변화하셔서 자신의 영광을 보이실 때 (막 9:2),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실 때 (막 14:33), 예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가셨다. 또한 마지막 날의 재난의 징조에 대한 말씀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안드레가 와서 조용히 물었을 때 말씀해 주셨다 (막 13:3). 예수님은 사역의 절정의 순간마다 제자들을 특별한 소그룹 환경에서 만나신 것이다. 더욱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의 소그룹을 친근히 하면서 무리들 (예: 마 13:34; 마 23:1; 막 7:17; 눅 9:23; 눅 12:1) 및 제자들 (예: 마 17:22; 마 20:25; 마 23:1; 막 4:34; 막 7:17; 막 8:34; 막 10:32; 눅 9:18) 을 구분하셨음을 제시한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따로 부르셨고, 어떤 메시지들은 제자들에게만 주신 것이 많고 (마 5:1; 마 9:37; 마 17:22), 파송을 보내실 때는 둘씩 묶어서 파송하셨다 (막 6:7; 눅 10:1). 특별히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고지는 제자들과만 있을 때 하셨다. (막 8:27-38; 막 9:30-32; 막 10:32-34). 예수께서는 열 두 사람을 택하시고 하나의 소그룹으로 만드시고 기약하시기를, 그들이 서로 사랑할 때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주를 믿게 되는 결과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 17:21-26) (니콜라스 1986).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마 18:20). 이것은 두세 성도가 모인 곳에 권징의 권한이 주어진다는 것과 아울러 주님의 임재가 있다는 말씀이다. 이 본문에 대해서 장로교회는 전통적으로 해석하기를 당회가 모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문에는 두세 장로라고 하지 않았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맥락상 당회를 배제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칼빈이 이 본문을 참된 교회에는 주님의 임재가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며 또 듣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를 지킬 때에 거기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신 주의 약속은 반드시 실현되기 때문이다” (칼빈 1996).” 사도들은 예수님의 소그룹 사역을 통해 가르침을 받았고, 기적을 경험했고, 주님의 영광을 친히 보았고 (벧후 1:16),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만났다. 이들이 이후 사역에 있어서 공예배와 더불어 소그룹 환경에서 활동했으리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기대이다.
B. 사도바울의 소그룹 사역
사도 바울은 순회 사역과 정착 사역에 있어서 대부분 소그룹 환경 속에서 사역하였다. 첫째, 그 자신이 소그룹 환경에서 사역하였다. 둘째, 사람들을 가정 등의 소그룹에게 가르치기를 즐겨했다. 셋째, 그는 사역자들의 소그룹 공동체를 일으켰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대부분 소그룹 환경에서 동역자들과 함께 사역하였다. 사도 바울은 혼자 사역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항상 복수의 사역자들이 소그룹으로 함께 일했다. 몇 개의 사례만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일년간 함께 큰 무리를 가르쳤다 (행 11:26). 안디옥의 제자들이 유대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낼 때에 바나바와 사울은 함께 보내졌다 (행 11:30). 안디옥의 리더들은 선지자와 교사로 불렸는데, 여섯 명이었다 (행 13:1). 안디옥 교회에서 선지자를 파송할 때 바울과 사울의 두 사람을 공동체 팀으로 세웠다 (행 13:2).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였다 (행 15:35).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골로새서를 쓸 때에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 에바브라, 누가, 데마, 두기고, 오네시모 등이 함께 거했다 (골 4:7-14). 바울이 로마감옥에서 빌레몬서를 쓸 때에 에바브라,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함께 있다 (몬 1:23-24). 뿐만 아니라 오네시모도 함께 있는 것은 자명하다.
사도바울은 전도여행을 다닐 때 팀이 항상 있었다. 바울이 아시아로 가라는 환상을 보고 아시아로 행할 때 적어도 실라, 디모데, 누가 등의 동역자가 있었다 (행 16:10). 바울이 아덴에서 혼자 있게 되자,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행 17:15). 아굴라, 브리스길라와 바울이 함께 거하며 일을 했다 (행 18:3). 바울이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던 중 전도를 하였다 (행 17:16). 이것은 매우 예외적으로 혼자 있는 시기였는데, 그것도 잠깐의 시간이었다.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수리아로 갈 때에 소바더, 아리스다고,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와 동행하였다 (행 20:4).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기존의 제자들과 아울러 몇 제자와 나손을 함께 데리고 갔다 (행 21:16). 바울이 죄수로서 로마에 가는 배에 기존 동행자들 외에 아리스다고가 함께 하였다 (행 27:2).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이 항상 동행한 사람들이 있었고, 심지어 같이 거했다는 것은, 그가 예수님의 본을 따라 제자들과 함께 거하며, 삶을 나누며, 가르침과 생활을 같이 하는 양육 전략을 취했다는 시사점이 된다.
둘째,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회당과 같은 장소뿐 아니라 소그룹의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에베소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모인 사람의 수가 열두 사람쯤이었다 (행 19:6-7). 바울 일행이 디도 유스도의 집에 들어가 일년 육 개월을 거하며 가르쳤다 (행 18:8, 11).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 형제들을 위로하였다 (행 16:40).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전했다 (행 20:20).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자세히 가르쳤다 (행 18:26). 이와 같은 표현들은 사도바울이 소그룹의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즐겨 했을 뿐 아니라, 일상적인 행동이었음을 보여준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집중 교육을 시키는 양육자의 면모가 있다.
셋째, 사도 바울은 사역자들의 소그룹 공동체를 일으켰다. 바울과 바나바가 살라미 지역부터 마가 요한을 헬퍼로 세웠다 (행 13:5). 마가 요한이 금새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은 후에 유다와 실라를 택하여 소그룹 사역공동체를 이루었다 (행 15:22, 27). 바울은 동역자들과 함께 기도를 했다 (행 16:13, 15). 에베소에서 가이오, 아리스다고와 동행하며 동역하였다 (행 19:29). 바울이 자기를 돕는 자들 중에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함께 파송했다 (행 19:22). 바울이 먼저 떠난 후 누가는 혼자가 아니라 동역자(들)과 함께 여행하였다 (행 20:5, 13, 14). 바울이 디모데를 권면할 때에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경건을 좇으라고 하였다. 이는 디모데가 속하는 공동체를 말한다 (딤후 3:22).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 중 그리스보, 가이오, 스데바나 집 외에 세례를 준 사람이 없다. (고전 1:13-16) 이는 세례를 바울이 아닌 다른 제자들이 주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그에게는 사역의 역할을 분담하는 공동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장로를 세울 때에도 한 사람을 세우지 않고, 항상 복수로 세움으로써 장로들이 사역자의 소그룹 공동체를 이루게 했다 (행 14:23). 다음과 같은 추가 증거들이 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편지 보내면서 권면할 때 그들 가운데서 수고하고 그들을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이 여러 명이라고 복수 표현을 사용한다 (살전 5:12-13). 바울이 디모데를 권면할 때에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로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하라고 하였다. 이 때에 복수형으로 사용하였다. 장로들이 여러 명이었고, 말씀을 가르치는 이들도 디모데 외에 둘 이상이었다 (딤전 5:17).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에 둔 것은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려 함이라고 했다 (딛 1:5). 복수형으로 표현하였다. 에베소의 장로들은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었다 (행 20:17).
C. 초대교회의 소그룹 사역
초대교회는 성전과 가정에서 모두 모였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다음에 예루살렘 교회는 처음에 성전에서 모였다. (행 2:46). 사도행전 5:12은 성전의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고 말하고 있다. 솔로몬 행각은 이방인의 뜰 동쪽에 있었는데, 미문이 있는 곳과 같은 방향에 있었다 (변종길 2007). 사도들은 이 성전에서 가르쳤다(행 2:42, 5:21, 25, 42). 성도들은 여기서 기도하고(행 2:42, 3:1, 4:23-31), 하나님을 찬미하고(행 2:47), 전도하였다(행 5:42). 이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오순절 전이나 후나 신앙생활의 중심지였다. 사람들은 1세기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서 회당에서도 모였다 (약 2:2).
물론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집’에서도 모였다. 그들은 날마다 ‘집’에서 모여 떡을 떼며 음식을 먹었다(행 2:46). 또 성전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가르치고 전도하였다(행 5:42).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의 ‘전체 교회’와 많은 ‘가정 교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집에서 모인 것을 두고 ‘가정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생각된다 (변종길 2007).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공중 앞에서나 집에서나” 모두 전파하고 가르쳤다 (행 20:20). “공중 앞에서”는 아마도 전체집회를 의미하는 것이며, “집에서” 는 가정집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목회에서 전체집회뿐 아니라 가정집회도 중요하게 여겼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조병수 2002).
에베소 교회에는 집과 회당과 강의실의 경우가 모두 등장한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였다 (행 18:18, 19; 고전 16:19). 바울은 유대회당에서 전파하였고 (행 18:19), 또 3차 전도여행 때에는 에베소의 회당에서 석 달 동안 하나님나라를 강론하였다 (행 19:8). 그런데 나중에는 ‘두란노 서원’ 즉 강의실을 세워 2년간 가르쳤다. 이렇게 에베소 교회의 모습을 통해 볼 때 사도바울의 사역은 가정집, 회당, 강의실이 모두 등장한다. 오늘날 초소형 교회를 주장하는 이들이나 가정교회 옹호자들이 주장하는 바 (정용성 2002) 성도의 가정에서 모이는 가정 교회만이 신약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주장은 지나치며 사실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종길 2007). 즉, “아무개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에서 촉발된 바 모든 초대교회 형태는 가정교회였고, 예배당은 콘스탄틴 대제 이후에야 등장한다는 주장은 (장동수 2006)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해당한다.
위 에베소 교회와 야고보서 사례를 보듯이, 콘스탄틴 대제 이전의 시대에도, 유대인의 회당제도를 본받아 신약교회가 상황에 따라 ‘회당’에서 모이기도 하고, ‘강의실’에서 모이기도 하고, ‘가정’에서 모이기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약 시대의 교회는 다 가정 교회였으며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주후 313년) 이전까지는 가정에서 모임을 가졌다는 주장은 지나친 것이며 신약 자체의 증거에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변종길 2007). 즉, 가정교회라는 형태가 독자적이고 의도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상황과 환경에 따라 가정에 모였다고 보아야 맞는 견해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초대교회에서 양육과 사역의 공동체성에 있어서 만큼은 의도적인 소그룹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제는 본 논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미국 이민교회에 대표적인 소그룹운동인 가정교회 운동의 장단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IV.휴스턴 서울교회의 가정교회 운동 진단 A. 장점
가정교회가 지닌 장점은 평신도 목자에게 목양사역의 책임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성도가 성도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평신도 사역이 된다. 이는 서울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과 다락방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목자가 되어서 목회를 한다는 점이다. 성도들은 은사를 사용하고, 양육을 하면서, 몸을 세우는 일에 참여한다. 가정교회 ‘목자’는 자신의 ‘목장’을 위해 전도하고, 양육하고, 모임을 이끌고, 음식도 준비하고, 때로는 라이드도 제공하면서 영혼 구원을 위한 활동을 하도록 되어 있다. 예배, 교육, 친교(상담, 심방), 전도, 선교 등 지역교회의 기능과 역할을 모두 감당하니까 정말로 목장은 다기능의 필요를 채워주는 소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임교역자는 성도들과 사역을 분담하니까 좋고, 성도들은 사역에 참여하니까 좋다는 것이다 (최영기 1996; 최영기 1999).
또한 성도들 간에는 교제의 회복, 불신자 전도 등의 회복이 가능하다고 한다. 성도들이 서로 진솔하게 나눔으로써 치유의 기능이 있고, 오픈 셀을 운영함으로써 불신자들이 편안하게 복음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될 수 있다.
B. 단점
첫째, 말씀 사역의 측면에 있어서, 성경 말씀의 순전한 복음 전파가 미약하다는 점이다. 가정교회에서는 설교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최영기 목사도 무엇을 설교하느냐 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최영기 1996). 복음의 깊이 있는 말씀을 제시하기보다 성도들의 상황에 필요한 설교를 하다 보니,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지만, 근원적인 강력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성경을 삶의 지혜를 위한 ‘매뉴얼’로 취급하는 것 같다. 가정교회를 도입하는 목회자들이 말씀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는 가정교회를 도입한 교회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동일한 양육프로그램들을 사용하는 데서 발견된다. 초신자들을 위한 ‘생명의 삶’ 같은 경우는 최영기 목사 자신이 직접 개발한 것이기에 최 목사가 전달하면 아주 힘있겠지만, 배워서 암기숙달하여 전달하면 그 효과가 과연 동일하겠는가? 방법론을 배워서 전달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목회자 자신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성도들을 직접 먹이려는 헌신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설교자의 말씀에 대해 헌신하기보다는 프로그램화된 소그룹 방법론 의지하고, 패키지화된 양육 성경프로그램을 카피하는 것이 현 가정교회 운동의 큰 좌초 요소이다.
이는 G-12, D-12 등의 셀교회 운동도 마찬가지 요소이다. 신앙의 유일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성경말씀의 실체가 비어 있다는 문제이다. 상황에 대응하는 설교를 하는 것은 동일한 이슈이다. 그리고 각각 4단계 또는 6단계의 양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원 강의 해주듯이 전달하는 것이다. 기능적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 관계를 중시하는 가정교회나 셀교회 운동에서 그 내용의 전달 방식을 며칠 컨퍼런스를 열어서 속성 과정으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전달하는 것은 모순적인 현실이다. 이는 가정교회 운동이나 셀교회 운동이 교회의 건강성 회복이라는 목표를 표방하지만, 이면에는 이미 권력지향적, 영향력 지향적이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둘째, 세례 사역의 측면에 있어서, 성도들이 깊이 있게 주님과 연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그룹 목자들의 탈진과 성도들의 얕은 수준의 변화로 나타난다. 목자들이 삼사 년 정도 밥 하고, 심방하고, 전도하고, 모임 인도하다 보면 탈진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탈진의 첫번째 이유는 목자들이 개인성경공부 능력을 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말씀 공부를 통한 영적 자양분 공급의 부재에 원인이 있다. 가정교회에서는 목자들에게 제공하는 양육프로그램은 패키지화된 것이 대부분이고, 성경 자체를 읽고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훈련은 미약하다. 제공하는 몇 가지 프로그램들이 기초적인 수준의 대화식 교리입문교육 (‘생명의 삶’)이거나 기초적인 수준의 경건 생활 입문 (‘새로운 삶’)이다. 그밖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경건한 삶 (리차드 포스터의 ‘영적 훈련과 성장’을 주교재로 한다)’, ‘부부의 삶’ 등 이미 기성품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성경 말씀 그 자체에서 나오는 깊고 시원한 샘물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이는 목장 소그룹의 참석자들에게도 연결된다. 성경공부가 아니라 친교 중심의 소그룹은 성장과 변혁의 엔진을 빼놓는 것과 같다. 성서를 배워보겠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 본 회퍼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회퍼 1964). 가정교회나 셀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신앙이 매우 얕은 수준에 있다는 것과 실질적인 성화 측면에서는 결핍된 된 것이 많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곧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것이 부족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정과 욕심과 육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생명으로 일어나는 바 성화가 참으로 일어나는 것이 관건이다.
셋째, 공동체 사역의 측면에서 있어서 주님의 공동체답지 아니한 모습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가정교회는 목사의 독재와 전횡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이다. 문제는 당회나 안수집사회와 같은 제도의 유무라기보다, 현실적으로 당회나 안수집사회가 제 기능을 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당회의 치리 기능을 무시하고, 평신도 지도자들은 목장의 운영에 매달리게 하면, 목사의 전횡을 막기 어려워진다.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하면, 기존 교회가 가정교회로 전환할 때 기존 직분자들의 역할 축소에 대한 반발이 예상된다는 점이다. 단순히 구역 모임을 활성화하는 차원이 아니라 교회의 정치구조와 양육구조를 바꾸는 운동이므로, 장로교적인 수용의 묘안이 서야 한다. 예를 들어 모든 장로가 실질적으로 목장을 운영할 수 있게 영적인 실력 향상을 이루어준다든지, 여러 개의 목장을 교구처럼 묶어서 장로들이 순방하면서 목양하게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목양 직분과 치리 직분을 구분하는 것도 필요하다.
가정교회나 셀교회 운동이 목사의 독재자화를 가능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목자들 또는 셀리더들 간에 경쟁을 시키기 때문이다. 목자들 또는 셀리더들은 새로운 목장 또는 셀을 분가시키는 것이 큰 목표가 된다. 그래야 목사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몇 개 이상의 목장을 분가시켜야 안수집사나 장로의 자격을 준다든지, 몇 개의 셀을 분가시켜야 G-12 셀 (담임목사가 직접 인도하는 리더셀)에 들어올 수 있게 한다든지 시키면 (김삼성 2003) 목사의 권력은 한없이 커지고, 목자나 셀리더는 목장의 분가 또는 셀의 증식에 경쟁적으로 전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연관된 이슈가, 가정교회 운동은 문어발식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또다른 형태에 불과할 수가 있다는 점이다. 교회 성장을 위해 목자를 이용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면, 이는 소위 평신도를 세우는 사역이 아니라, 평신도를 이용하는 사역이 되고 만다. 관계성을 중시한다고 하는 가정교회에서 담임목사와 부교역자들이 사역자들의 소그룹 공동체로 모이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부교역자들은 지시와 보고의 관계뿐이라면 가정교회는 허울일 뿐이다. 또한, 관계성을 중시하는 가정교회에서 담임목사가 성도들과 목장 소그룹을 이루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담임목사가 목장을 순방만 하면서 실제로 영혼들을 섬기는 씨름이 없다면, 이미 그것은 조직을 관리하는 하나의 기법으로 전락했다는 표지가 될 것이다. G-12, D-12 등 오픈 셀 운동들이 그러하지만, 진실한 말씀의 역사와 사랑의 관계가 없다면, 보험회사나 다단계회사와 같이 사람들의 인맥을 이용하는 편리한 관리기법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넷째, 신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되는 것은 ‘가정교회’를 독립적이고 완전한 교회로 볼 수 있느냐이다 (이상규 2007; 변종길 2007). 가정교회가 실책하고 있은 것은 목장 소그룹을 가정교회라고 부르며, 주일의 예배를 가정교회들의 연합모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례와 성찬을 실시하지 않으며, 치리 기능이 없다면 ‘교회’라는 이름을 써서는 안된다 (유해무 2007; 변종길 2007). 가정교회 운동만이 성경적이며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착시현상이요, 어불성설이다.
이에 대해서는 단어의 의미들에 대한 주해적 접근은 지양하고, 다만 위에서 한 논의들을 살펴볼 때, 성경은 교회의 공간이나 규모나 상세 방법론을 제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목회의 본질과 교회의 표지, 그리고 목사와 장로의 역할을 제시하였다는 점으로 답을 대신하려고 한다. 다만, 목장이라는 오픈 소그룹을 가진 교회는 성경적으로 가능하다고 하겠다. 관건은 교회의 표지와 직결되는 바 말씀의 사역, 세례의 사역, 양육의 사역이 합당하게 일어나느냐이다. 성경을 억지로 꿰어 맞추려는 시도는 G-12나 D-12 등의 셀처치 운동에서도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오류가 바로 꼭 열두 명의 숫자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성경은 사역자들이 그런 식으로 제자의 수를 맞추라고 한 적이 없다.
V.결론
하워드 스나이더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실제로 활발한 교회치고 소그룹 없는 교회는 없다. 그러나 소그룹에 대한 마술적인 공식은 없으며, 소그룹들이 지나치게 프로그램화 되어서는 안된다” (스나이더 2006). 또한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몇몇 미국 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치명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교회가 성장의 방법론에 매혹되어서 교회가 세속화되는 위험이라고 하였다 (클라우니 1999). 현재의 소그룹 운동들이 그 주창자들의 성공과 그 추종자들의 성과에 고무되어 하나의 성장의 방법론으로 둔갑한다면 그 독성은 교회를 마비시키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개혁주의적 가치에 입각한 소그룹 사역은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 하는가? 구체적인 방법론과 대안은 이 논문의 주제가 아니므로 논의를 약하고, 간단하게 요점만 살피도록 한다.
✓ 말씀 사역의 차원
- 소그룹에서는 성경말씀을 공부하는 요소와 삶에 적용하는 요소가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 공예배에서는 진리의 말씀 곧 성령의 검을 예리하게 갈고 다듬어 설교말씀 선포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도록 힘써야 한다.
✓ 세례 사역의 차원
- 기도를 통해 경건을 연습하고, 주님 안에 연합되어 성화의 도정을 걷도록 성도들을 도와야 한다.
-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의 능력으로 살도록 성도들을 가르치고 지도해야 한다.
✓ 공동체 사역의 차원
- 장로들과 직분자들이 성경을 가르치고, 성도를 권면하며, 공동체를 만들고, 공동체를 지킬 수 있는 역량을 개발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 직분자들이 소그룹 모임을 직접 이끌면서 영적인 ‘아비들’로 (요일 2:13-14) 성장하여 영적 ‘자녀들’을 기를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이끌고, 도와야 한다.
- 목사, 전도사 등 사역자들이 예수님이나 바울처럼 참된 사역공동체로 이룰 수 있도록, 사역자들이 소그룹 공동체성을 이루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현재 유행하고 있는 소그룹운동들이 개혁주의적 교회의 원리를 따라 지혜롭게 디자인 되고, 성경말씀의 순수하고 강력한 선포가 병행되며, 성령님의 하나되게 하시고 교제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는 역사들이 나타난다면 아름답게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개혁주의 교회론에서 보는 것과 같이 참 교회의 표지들로 연결되는 말씀의 사역, 기도의 사역, 공동체의 사역이 합당하고 충만하게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굳이 가정교회나 셀처치가 아니더라도 소그룹이라는 환경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주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의 참되고 순수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우리의 힘쓸 주제이고, 기도와 성례의 참된 의미 즉,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경건과 성화가 일어나는 것이 우리의 힘쓸 주제이며, 참되게 사랑하고 함께 동역하고 성도들을 세우는 참된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힘쓸 주제이다. 이 모든 목회의 본질이 서로 교차하고 연합하여,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합당하신 오직 한 분,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복된 복음이 강력하게 나타나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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