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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 복음 목회를 다시 찾다

작성자
newcity church newcity church
작성일
2018-10-17 19:30
조회
1175

인공지능 시대, 복음 목회를 다시 찾다

오종향

 

본 글에서는 인공지능 시대가 복음 목회에 주는 시사점을 찾아서 그 방향의 초안을 그려보려고 한다.

1. 4차산업혁명은 과연 무엇인가?
최근에 인공지능이 바야흐로 화두에 오르면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거의 날마다 인공지능을 필두로 4차산업에 대한 글들이 신문지상에 오르고 있으며 거의 매주 새로운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접근도 산업전략적인 측면에서 클라우스 슈밥이 인더스트리 4.0을 다보스 포럼에서 어젠다를 제시한 것을 필두로 하여, 수많은 경영연구소, IT기업, 대기업, 그리고 경영학자들이 4차산업의 발전 방향과 대응과제에 대하여 활발한 토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 등에 대해서 철학, 인지과학, 공학, 교육학 등에서도 활발한 담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게다가 정부에서는 대통령령으로 ‘4차 산업혁명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규정’을 두어 국가적인 시책을 펼치고 있다.
정부가 정의하기에는 “초연결 초지능 기반의 4차 산업혁명 도래에 따른 과학기술 인공지능 및 데이터 기술 등의 기반을 확보하고, 신산업 신서비스 육성 및 사회변화 대응에 필요한 주요 정책 등에 관한 사항을 효율적으로 심의 조정하기 위하여 대통령 소속으로 4차 산업혁명위원회를 둔다.”고 하였다 (제 2조 (설치 및 기능) 내용).
그런데 이러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정확히 정의된 것은 아니며, 과연 이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논쟁은 존재한다. 예컨대 2016년 말 세계경제포럼 (다보스 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의 이해>라는 주제로 포럼을 한 것이 기점이 되어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는 클라우스 슈밥 다보스 회장의 책을 통해 용어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용어는 보편적인 용어가 아니며, 슈밥 회장이 몸담고 있는 독일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독일에서 사용되는 용어도 인더스트리 4.0이라고 한다. 독일과 일본에서 이러한 용어를 사용할 때는, IoT 기술, 로봇공학, 인공지능, 빅데이터 분석 등을 통해 공장자동화, 무인공장화 등을 우선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동남아시아에 있던 아디다스 공장을 독일로 다시 옮겨가서 무인 자동화 공장을 만드는 것이 그런 예이다. 또한 일본에서도 대표적인 공작기계 기업인 화낙이 IoT 기술, 센서 기술, 현장자동화 기술을 통해 제조경비를 줄이고 시스템 플랫폼을 선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예가 4차 산업혁명이 제조업에 미칠 영향으로 보고 있다. 이 정도의 IoT 기술 발전만으로도 포춘 500대 기업의 40%가 교체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인더스트리 4.0은 획일화, 중앙집중화된 3차 산업혁명의 패러다임을 부수고, 아주 유연화된 맞춤형 생산시스템을 지향하는 것이며, 이는 제조업 공종의 경우는 최적화, 조직화, 자가 진단, 지능화를 갖춘 공장을 만드는 것이다.
위 예에서 보는 것과 같이 기업 현장에서 4차 산업혁명이란 다분히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을 어떻게 산업의 발전에 연결하느냐로 보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한국정보통신학회에서는 4차산업혁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모바일 등 첨당 정보통신기술이 경제사회 전반에 융합되어 혁신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차세대 산업혁명.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클라우드 컴퓨팅, 빅 데이터, 모바일 등 지능정보기술이 기존 산업과 서비스에 융합되거나 3D 프린팅, 로봇공학, 생명공학, 나노기술 등 여러 분야의 신기술과 결합되어 실세계 모든 제품 서비스를 네트워크로 연결하고 사물을 지능화함.”
클라우스 슈밥도 이와 비슷한데, 물리학, 디지털, 생물학의 혁신기술들이 모여서 제 4차 산업혁명이 된다고 한다. 정의를 어떻게 내리든, 범위를 어떻게 정하든, 방향을 어떻게 살피든 분명한 것은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유행같은 현상 속에 인공지능 또는 인공 알고리즘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2. 4차산업시대의 주요 의제는 어떤 것들인가?
산업계에서는 미래 산업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의 화두로 본다. 앞으로 기업과 시장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하는 주제이다. 삼성전자에서 20년 넘게 정보전략을 담당해온 강명구는 4차 산업혁명의 키워드는 맞춤, 분권, 개방이라고 설명한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4차산업혁명 이야기>). 강규일은 인공지능, 빅데이터, 가상현실, 블록체인 등이 부의 이동을 일으킬 것이라면서 미래를 준비하라고 한다 (<한 권으로 읽는 4차 산업혁명>). 프로그래머들은 코딩과 디자인으로 미래를 설계하라고 주장한다 (안무정, 4차산업혁명을 주도할 6가지 코드). 교육과 관련하여, 4차산업혁명 시대에 생존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근대교육과 아울러 새로운 교육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삼성경제연구소의 김은환은 인간의 유연성과 창의성이 인간의 비교우위 포인트라고 주장한다.
기술의 활용에 관심이 많은 산업계와는 달리, 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는 공학자들, 개발자들, 과학자들은 기술 자체의 발전에 관심이 많다. 인공지능 쪽으로 한정하여 다룬다면, 과연 한 가지 기능을 잘 수행하는 제한된 인공지능 외에도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범용 인공지능이 개발될 수 있을 것인가? 인간보다 계산을 수천만 배, 수억 배 잘 수행하는 약인공지능 외에 자의식이 있어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강인공지능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인가? 등이다. 인간보다 뛰어난 초인공지능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주제들이다. 여기에는 공학적인 이상주의와 공학적 현실주의가 모두 존재한다. 지금은 안 되지만 언젠가는 강인공지능과 초인공지능이 나올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이도 있고, 그런 것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소극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이도 있고, 아무리 그래봐야 기계는 기계라는 주장들도 있다.
인공지능과 관련하여 뜨거운 분야는 기술에 대한 질문보다는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분야이다. 지능이 있는 기계는 인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린다면 지능이 있는 기계가 내린 결정에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가? 형사 처벌을 자율주행 운반 기계에 내릴 것인가? 아니, 그 이전에 지능은 무엇인가? 인간의 마음처럼 작동하는 기계를 만든다고 하면 과연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기계처럼 생각하는 인간과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 중에 누가 더 인간적인가? 과연 탁월한 계산기능과 업무기능을 하는 기계보다 인간이 다른 점, 또는 우월한 점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김대식은 만일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초인공지능 로봇이 세상을 통치할 경우, 인류를 말살하지 않고 보존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물은 바 있다.
이러한 질문은 인류의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확산되기도 한다. 사람이 도구를 만들고, 도구가 사람들 만드는 순환 관계 속에서, 사람이 테크놀로지를 만들고 테크놀로지가 인간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한 논의이다. 트랜스 휴먼 이론을 주장하는 스웨덴의 닉 보스트롬이나 미국의 인지과학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나 또는 철학자 대니얼 데닛 등은 인공지능의 발전이 인류에 위협을 끼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이 인공지능을 만들고 인공지능이 사람에 영향을 미치는 관계 속에서 인간이 호모 데우스 즉 신적인 인간이 될 것이라고도 하기도 한다. 인간의 영생이 가능하다거나 인간이 신의 경지에 이르는 날이 멀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 한국의 철학자 김재인은 조목조목 반박한다.
인간이 다른 점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답변들이 제출되고 있다. 철학자 김재인은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에서 인간의 마음은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 능력이라고 통찰한다. 인간의 마음은 자가수선이 가능해야 마음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고장 난 것을 스스로 고칠 수 있어야 비로소 마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컴퓨터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뇌의 작동방식과 비슷하다는 기존의 주장에 대한 폐기 선언이다. 컴퓨터의 작동방식은 인간의 마음의 방식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뇌과학 연구를 통해 컴퓨터와 뇌는 작동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소위 인공지능이라는 것은 시간에 따라 그 정의가 변했다. 수십 년 동안 선형회귀 분석, 의사결정수, 베이지안 네트워크, 뉴럴 네트워크, 진화적 알고리즘 등의 방식으로 소프트웨어들이 발전해 왔다. 그러나, 지도 학습을 하는 소프트웨어와 달리 마음은 자율학습을 한다. 마음은 컴퓨터와 달리 목표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주어진다. 인공지능의 신경망은 무수한 연산과 축적의 결과로 주어지는 경직된 학습방식이라면, 인간의 신경망은 손실과 추가의 과정 속에서 유연하게 움직인다. 인간의 뇌는 망각, 왜곡, 편집을 하면서 기억을 새롭게 하지만, 컴퓨터는 망각, 왜곡, 편집이 있으면 오작동이 일어난다. 인간의 마음이 있다는 것은 확인이 되지만,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마음이 생성되는지, 어떻게 마음이 작동하는지에 대해 인류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공지능이라고 해서, 그 지능이 인간의 지능도 아니거니와 인간의 마음은 더더욱 아닌 것이다. 인간보다 연산이나 기억이나 정해진 규칙에 따른 작업을 잘 수행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다섯 살 아이가 가진 마음을 컴퓨터가 갖게 할 수 있느냐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3. 인간에게는 무엇이 중요해지는가?
앞으로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에게 어떤 능력이 중요한가에 대한 질문들이 있다. 첫 번째로는 창의성과 상상력을 예로 든다. 교육 및 직업에 관련해서, 인공지능이 수많은 일자리를 없앨 것이라는 흑색 전망이 많이 나와 있다. LG경제연구소는 AI가 한국에서만 1136만 명의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이는 국내 취업자의 43%에 해당하는 숫자라고 한다. 인공지능과 관련하여 어떤 직업들이 사라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들이 있는데, 대개의 의견은 배우기 어려운 복잡한 일들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본다. 수학, 과학, 암기 등이 필요한 일들은 인공지능이 훨씬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공지능의 시대에는, 인간의 창의성이 중요해진다고 강조한다. 창의성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가능하지만, 단순한 코딩 기술이 아니라 뭔가를 만드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창의성과 상상력이 인간의 특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만만치않은 반론도 존재한다. 창의적이지 않은 사람은 기계보다 못한 것인가? 인간의 창의성과 상상력이라는 것이 정말 대단한가?
둘째, 어떤 이들은 감정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소통하고, 갈등을 풀어가는 역할들이 인간의 고유 영역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이러한 창의성과 감정의 영역, 즉 예술의 영역에서 인간다움이 확인된다고 주장한다. 인공지능 기계가 작곡도 하고, 소설도 쓰고, 그림도 그릴 수 있다. 그것은 기계적 창조성일 뿐 마음으로 공감하고 소통하고 신뢰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즉, 기계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인공지능을 접하면서 우리는 무엇인가 사람다운 것을 찾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셋째,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자기 성찰 능력이 인간의 고유점이다. 시킨 대로 프로그래밍 하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프로그래밍을 하는 능력이다. 프로그램은 자신의 프로그램을 수정하지 못한다. 알고리즘은 자신의 알고리즘을 스스로 형성하지 못한다. 문제의 정의와 해결의 목표 방향을 외부에서 인풋해야만 한다. 결국 인공지능이 못하는 것은 어떤 계산 직무를 수행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코드를 성찰하면서 그 코드를 바꾸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정의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문제를 왜 푸는지 아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영역이다. 초인공지능을 상정할 경우 이외에는 인공지능에게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이라는 도구가 이롭게 사용될 것이냐, 해롭게 사용될 것이냐는 목표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넷째, 종합적 (시스템적)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라고 한다. 단편적으로 한 가지 일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공동의 비전을 함양하고, 글로벌 사회의 모든 이해관계자와 협력하며, 시스템이 주는 혜택의 공유 방식과 대상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한다” (클라우스 슈밥, 제4차 산업혁명 더 넥스트, 285쪽). 즉, 기술, 기업 구성, 가치의 세 분야에서 문제를 집단적으로 해결하는 리더십이다. 타인과 공동체를 이롭게 할 수 있는 리더십이다.

4. 목회에 어떤 시사점을 주는가?
1) 과연 인공지능이 목회를 대신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의 대두가 교회의 필요성을 소거할까? 교회의 기능을 인공지능이 대신하고, 성경을 빅데이타와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대신할 수 있을까? 성직자의 기능을 인공지능 로봇이 대신할 수 있을까? 기독교나 종교를 인공지능 시스템이 대신할 수 있을까?
이철신 영락교회 목사는 종교개혁 500주년 국제포럼 개회예배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인공지능이 성경의 원문과 번역본, 사전, 주석과 자료들을 제공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감동을 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이 의미하는 바는 인공지능이 줄 수 없는 것을 목회자가 주어야 한다는 답변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무엇을 할 수 없는가?
약 (weak) 인공지능, 강 (strong) 인공지능, 초 인공지능등으로 구분하는 통상적인 구분법이 있다. 그에 따라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 약인공지능이 못하는 것: 질문을 만드는 것, 데이터 없이 학습하는 것,
- 강인공지능이 못하는 것: 프로그램을 스스로 바꾸는 것.
- 초인공지능이 못하는 것: 물질이 영혼을 갖는 것. 또는 인지혁명이 일어나는 것.
즉, 지금 기업들과 연구소들에서 개발하는 것들은 약인공지능들인데, 이는 인간이 목표를 설정하고, 인간이 정리된 빅데이타를 제공하고, 인간이 코딩을 한다. 사물인터넷, 초고속통신망, 빅데이타, 사물인식 센서 테크놀로지, 의사결정 알고리즘 등이 총체적으로 구현되는 인공지능 서비스들은 인간의 손에 쥐어지는 도구들이다. 약인공지능 기반 서비스들이 앞으로 의료, 교육, 교통, 학문, 정보, 제조, 유통 등 생활 전반에서 일어난다는 데 전문가들은 모두 동의한다. 그래서 지금 단순히 암기, 계산, 문제해결 등의 능력을 키우는 것으로는 기계를 이길 수 없다. 이미 인간은 1만원 짜리 계산기보다 계산을 못한지 오래되었다. 즉,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인간이 잘하는 영역이 아니다. 교육계에서도 단순히 정보 전달을 하는 교육으로는 미래의 인재를 확보하지 못한다는 자성이 크게 일고 있다.
강인공지능의 경우 스스로 프로그램을 바꾸지 못한다. 즉 자기 성찰을 하지 못한다.
초인공지능을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철학자 김재인은 견고하게 주장한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인지혁명은 말하자면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철저히 진화론적, 물질환원론적 논거이다. 물질이 영혼을 갖는 것, 또는 기계가 마음을 갖는 것은 하라리가 말하는 1차 혁명에 비견할 만한 것인데, 이는 2차 혁명, 3차 혁명과는 전혀 다른 하늘과 땅의 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런 점들을 살펴본다면, 목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가 나오게 된다.
- 일방향적 주입식 전달을 벗어나야 한다. 소통의 목회를 해야 한다. 경청하며 공감하는 목회가 되어야 한다. 소통하고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워야 한다.
- 관계성 속에서 목양을 해야 한다. 쌍방적인 일대일 관계, 교감이 있는 소그룹 관계 속에서 쌍방향 소통이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 국민일보 종교부 기자 신상목은 “성도의 삶을 챙기는 목양이 회복돼야 한다”고 호소한다. “성도들이 바라는 목회자의 목양 행위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이름을 불러주면 된다. 성도 가족의 근황에 관심을 가져주시라. 적당한 주기로 심방해서 식구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기독교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함께 고민하며 좋겠다. 무엇보다 교인 가정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손잡아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신상목, “다시 목양으로”, 국민일보 2017년 3월 24일).
- 정보제공의 역할을 뛰어넘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좋은 질문을 던지는 목회를 해야 한다. 예수님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3백 번 가까이 사람들에게 질문하셨다. 또한, 스스로 질문하고 학습할 수 있는 리더들을 키워야 한다.
- 자기성찰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새롭게 하도록 도와야 한다. 자신의 목표를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도와야 한다.
- 영혼이 변화되도록 도와야 한다. 영혼을 돌보는 목회를 해야 한다. 규모를 키우고 건물을 늘리고 조직을 확장하는 것보다 사람들의 영혼이 달라지는 것이다. 마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2) 기술이 신이 되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간은 기술을 만들고 기술은 인간을 만든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이나 그 도구가 사람을 바꾼다. 기술 또는 예술을 의미하는 ‘테크네’에 어원하는 테크놀로지는 현대에 이르러 자율적인 변형 몇 진화능력 곧 자기조직화가 가능하다는 관념에까지 도달하였다. 그래서 하이테크 담론에는 기술이 자율적인 생명을 갖으며 복잡하고 통제불가능하게 되고, 그리하여 마법적, 초자연적, 영적 차원에 도달하는 현상들이 나오고 있다. R. L. 러츠키가 <하이테크네>에서 주장하듯, “테크놀로지는 단순히 인간의 통제 하에 있는 대상이나 도구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231쪽). 모더니티가 도구론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테크놀로지를 묘사하려고 하였다면, 모스트모던 담론은 테크놀로지를 인간의 지식과 통제를 넘어서는 것으로 묘사하며, 인간 지배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영적, 마법적, 초자연적 담론에까지 연결된다. 인공지능과 관련된 소설들과 에세이들에서 인간과 신,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테크놀로지의 영성은 미신적 영성과 연결된다. 테크놀로지에 관한 뉴에이지 담론은 일명 테크노 샤머니즘의 세계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인간이 만든 도구가 도구의 자리를 뛰어넘어 인간을 규정하는 우상의 자리에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 그 우상을 손에 쥔 인간은 이전의 인간이 아닌 새로운 인간, 즉 신과 같은 인간으로 격상되게 된다. 그 우상이 이제까지 없었던 도구 즉 테크놀로지이기 때문에, 새로운 도구가 강력하게 등장할 때마다 인간이 신이 된다는 창세기 3장의 하나님 제거 내러티브가 다른 모양으로 비틀어져 재등장한다.
사람들이 인공지능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인공지능을 오해하는 것이다. 인간이 코딩한 것을 빠르게 계산해서 수행하는 것이 인공지능이다. 이것은 테크놀로지이다. 그러나 이것이 마음을 갖지는 못한다. 1천억 개의 뉴런을 컴퓨터로 복제하듯 구현해도 인간이 가진 것 같은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다른 우상들과 마찬가지로, 기술, 하이 테크놀로지가 우상이 될 때, 그것은 신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는 잘못된 기대감을 사람들에게 심어준다. 그리하여 기술결정론이라는 물질주의에 빠진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를 받았다.

3) 구체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가. 도시: 사람들의 마음을 파악하기.
미국 뉴욕에서 사역한 팀 켈러 목사는 <센터 처치>라는 책을 통해 현대사회를 도시 사회라고 분석하였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의 목회를 도시 목회라고 명명하였다. 도시는 수많은 게토들로 구성된 곳이다. 도시 발달과 국제 교류, 문화 세분화가 일어날수록 사람들을 저마다의 세상 속에서 단절되고 고립되어 살아간다. 도시가 발달한다는 것은 단지 사람이 많아지고 건물이 높아지고 도로가 복잡해진다는 뜻만이 아니라, 파편화되고 단절되고 조각난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뜻이다. 거대 도시는 수많은 게토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사는 조각 속에서 살아간다. 도시는 조각 나고 파편이 난 분절된 삶의 방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이다. 그래서 도시에는 시골보다 빈부격차가 심하고, 문화 격차가 크다. 문화 격차, 가치관 격차, 계급 격차가 심한 곳이 도시이다. 현대사회는 극심하게 도시화되었고, 수백 수천 개의 작은 보이지 않는 담들로 둘러싸인 게토 속에서 현대인이 살아간다.
인공지능이란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파악하는 기술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빅데이타이다. 신용카드 사용 이력, 검색 이력, CCTV에 담긴 데이터들이다.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서 수많은 IoT장비들, 디지털 센서들, 카메라들이 사용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초고속 통신망과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과정 속에서 현대의 약 인공지능이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어디에 머무는지, 무엇을 소비하기 원하는지, 어떤 만족을 느끼기 원하는지, 언제 어디서 얼마나 돈을 쓰는지 하는 것이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공지능 알고리듬 기계들과 서비스들이 하는 것은 조각나고 단절되어 이질적인 자기 경계선 안에서 살아가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그것을 기업에, 정치에, 교육에, 안보에, 공익에, 보건에 사용하려는 것이다. (때로는 테러에, 전쟁에, 조작에 사용되기도 한다).
현대인은 과거의 십인십색, 백인백색을 뛰어넘어 천인천색, 만인만색이 아닌가! 결국 기업은 소품종 대량생산을 가능케 한 2차, 3차산업혁명을 뛰어넘어 다품종 소량 맞춤 생산과 서비스가 가능한 4차산업혁명을 꿈꾸는 것이 아닌가! 교회는 어떻게 이러한 시대에 대처할 것인가? 팀 켈러 목사는 이러한 현대의 도시환경 속에서 복음을 들고 선교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상황화를 강조한다. 그것은 복음의 씨앗을 심는 밭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장 목회이다. 그것은 전도 현장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전도하면서, 상담하면서, 양육하면서, 훈련하면서, 수십 명의 이야기를 매주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팀 켈러 목사의 설교의 출발점이다. 그것이 변치 않는 복음을 들고 세상 속에 들어가 끊임없이 소통하며 연결하며 목회하는 것이다. 도시를 안다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들을 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숱한 질문들을 그들의 언어로 공감하며 이해하며 소통하는 것이다.

나. 복음: 복음의 능력과 사역방법을 재발견하기.
팀 켈러 목사는 <센터 처치>에서 복음은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복음은 무엇보다 인간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듣고 깨달을 때이다. 복음은 어떻게 살라고 하는 충고로 머물지 않으며, 우리에게 구원자가 계시다는 소식이다. 복음은 우리가 단점을 극복하고 신이 되라는 계몽이 아니며,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소식이다. 복음의 핵심은 인간의 행동이나 습관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은혜를 깨닫고 마음이 변화되는 것이다. 모든 선한 것은 마음에서 나온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마음을 지키라고 하셨다. 그 마음에서 모든 선한 것과 생명이 나온다. 그 마음은 성찰이나 수행을 통해서 변화되지 않으며, 마음과 몸을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모셔들일 때 변화된다. 복음을 재발견할 때 갱신과 부흥이 일어난다. 이럴 때 진정한 자기성찰이 일어나며 자기 변화가 일어난다.
상황화 작업은 질문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목회자들은 비신자들과 교인들에게 좋은 질문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리고 가르치는 태도로 정보 전달, 교훈 제시, 충고 하달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배우는 마음으로 경청하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질문들과 아픔들과 고통들과 답답함들을 자세히 파악해야 한다. 진단도 없이 처방을 하는 의사는 신뢰하기 어렵듯이, 내 마음을 이해도 못하면서 충고를 일삼는 종교지도자도 신뢰를 잃어간다.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신뢰를 잃고 있다고 할 때, 이는 단지 도덕윤리만의 문제가 아닌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국 사람들은 변화되고 싶은데 지도자들도 변화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것이 진리인가 하는 질문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변화되고 싶어한다. 개선되고 싶어한다. 행복해지고 싶어한다. 불행한 마음이 없어지고 싶어한다. 그럼 그들의 불행과 불만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오해들은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서 막혀있는지, 어디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요즘 인공지능이 하던 것을 교회는 역사 속에서 개인 상담과 개인 전도와 심방과 제자훈련과 멘토링을 통해서 해왔다. 목회 활동 속에서 복음의 본령을 재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 운동: 하나님 나라의 운동의 순수함과 연대를 회복하기
한국인들의 마음의 지도를 그리는 빅데이타 작업은 어느 대형교회나 걸출한 목회자 몇 명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국 성도들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파악하는 것과 아울러 교회를 다녔다가 떠난 15백만 이상의 사람들이 가지는 하나님과 인생에 대한 질문들이 더 잘 정리될 필요가 있다.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자처하는 50% 가까운 인구의 마음 속에 있는 질문들, 불교, 유교, 무속 등의 전통사상이 과학주의, 합리주의, 진화론 등의 현대사상과 만나면서 한국인의 마음 속 생각들과 질문들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한국 교회는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개인주의, 물질주의 등의 사조들이 한국의 새로운 세대를 뒤덮으면서, 기존의 권위주의, 집단주의, 공동체주의, 도덕주의적 삶의 지향들이 어떻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 한국 사회가 어떤 생각과 감정과 지향의 게토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한국 교회는 파악하고 있는지 질문하고 싶다.
그리하여, 이러한 작업은 몇 개의 사회 조각들 속에서 한 교회를 중형교회나 대형교회로 키우는 작업을 넘어서, 비신자들의 마음을 읽고, 심층 마음을 파악하고, 그리하여 그들의 질문들에 효과적으로 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하이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로우 트크놀로지에 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 대 사람으로 사람을 대하고, 사람들의 감정에 영향을 주어 삶의 변화를 일으키고, 사람들에게 자성적 질문을 던지게하고, 자기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일은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일이면서, 교회가 사회에 줄 수 있는 고유하고 탁월한 섬김이며 사명이 아닌가. 기존의 비복음적 사회 질서 가운데 새로운 삶의 상상력을 발휘하며 창조적으로 가정과 사회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복음의 능력을 받아 새로운 생명을 누리며 새하늘과 새땅을 여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이지 않겠는가.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참된 영적 부흥은, 우리가 남한의 5천만, 북한까지 8천만의 사람들의 마음 지도를 그리며, 그들의 질문에 답하는 영적 알고리즘을 함께 찾아가며, 공유하는 상황화되고 연합적인 복음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으로 결어의 문장을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