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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종교개혁자 칼빈의 교회개척운동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 시리즈
작성자
newcity church newcity church
작성일
2018-10-13 21:58
조회
915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 시리즈 - 목회와신학 2014년 10월호

 

종교개혁자 칼빈의 교회개척운동

오종향 목사 (뉴시티교회 개척 담임, 서울 서초동)

 

1. 들어가며: 칼빈과 교회개척운동

존 칼빈은 16세기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교개혁자였으며, 또한 교회회복 운동가였다. 그동안 칼빈이 교회개척운동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은 별로 부각되지 않았다. 복음사역을 통한 교회개척은 칼빈의 종교개혁에 있어서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종교개혁을 확산하고 완성하는 것은 교회개척에 대한 집중된 헌신을 통해 이루어졌다. 칼빈 당대에만 수천 개의 교회가 유럽에 개척되었다. 이러한 종교개혁은 복음적 기독교 회복 운동이었는데, 교회개척사역에 대한 우선순위를 통해 열매를 맺게 되었다. 칼빈은 조직신학자요 성경신학자이며 설교자이고 목회자였지만, 무엇보다도 종교개혁 당시 유럽에서 불길처럼 일어난 교회개척운동의 지도자였다. 칼빈이 그러했듯이, 진정으로 복음 본원으로 돌아가는 종교개혁의 정신은 필연코 복음 본원을 붙잡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교회개척의 결단과 헌신과 운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칼빈은 위대한 종교개혁자였다. 마르크스주의자 레온 트로츠키는 레닌이 1917년 러시아혁명을 일으키고 구 소련연방을 만드는 것을 도운 인물이다. 트로츠키는 서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가로 칼 마르크스와 존 칼빈을 꼽았다. 칼빈은 단순한 사상가, 철학자, 신학자가 아니라, 복음의 우물을 재발견하여 종교개혁의 토대를 쌓고, 설교자/목회자를 훈련하고 선발하고 파송하여 교회개척의 운동이 일어나도록 헌신한 운동가이며, 개척가이며, 지도자이다. 진정한 종교개혁은 복음을 담아내고, 구현하고, 살아내는 교회를 개척하며, 세우며, 확산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고, 확인되고, 완성된다.

필자는 지난 5월호를 시작으로, 주로 개혁주의 진영에서 미국교회들에서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 교회개척운동의 중심 교회들을 살펴보았다. 뉴욕의 리디머장로교회 (팀 켈러 목사), 샌디에고의 하버장로교회 (딕 카우프만 목사), 아틀란타의 페리미터교회 (랜디 포프 목사), 시애틀의 마즈힐교회 (마크 드리스콜 목사), 켄터키의 주권적은혜교회 (C. J. 매허니 목사) 등이 주역 교회들이다. 이 외에도 워싱턴 D. C.의 캐피털 힐 침례교회 (마크 데버 목사), 미네소타의 베들레헴 침례교회 (존 파이퍼 목사) 등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지금 열거한 목회자들은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의 권위를 강조하는 개혁주의자들이면서 동시에 불신 세계 속으로 들어가 삶을 공유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선교적 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목회자 지도자들이다. 개혁주의와 선교적 운동이 교회적으로 만나서 교회개척운동의 물줄기를 키우고 있다.

이번 달에는 칼빈의 교회개척사역에 대한 재평가가 최근 학문적으로도 이루어지고 있는바, 종교개혁 기념일을 맞이하며 칼빈을 통하여 일어난 어마어마한 교회개척사역의 역사 자료를 짚어보려고 한다. 칼빈이 어떻게 그러한 사역을 준비하고 주도하고 진행하고 지원하였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서 종교개혁의 정신이 절박하게 요청되고 있는 한국교회 상황에서 의미 있는 성찰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2. 칼빈의 교회개척사역에 대한 재평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선교활동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존 칼빈은 브라질에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그 당시 브라질 선교의 문은 열리지 않았고, 브라질 사역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의 선교지가 머나먼 대륙에만 있지는 않았다. 가까운 프랑스가 바로 선교지였다. 칼빈은 프랑스를 비롯해서 유럽 곳곳에 복음의 사역자들을 파송했고, 교회가 개척되도록 했다.

칼빈은 신학자이고 제네바의 목회자였지, 교회개척과는 관련이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칼빈의 교회개척 활동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자세한 보고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과거 서구의 여러 선교역사 학자들은 칼빈이 전도나 선교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고 기록했다. 특히 칼빈이 예정론을 강조했고, 전도나 교회개척에는 소극적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전도나 선교에 대한 언급이 많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서신서 강해 등을 보면 기독교강요에서 다루지 않은 복음 전파의 이슈를 다수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영국성공회의 피터 윌콕스 (Peter Wilcox)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면서 제네바의 내부 서고를 샅샅이 훑었다. 윌콕스 박사는 존 칼빈이 주고받은 수 천 개의 먼지 쌓인 미발간 서간문을 찾아 읽었다. 칼빈의 시편 강해, 사도행전 강해, 선지서 강해 등의 자료들을 직접 살펴본 결과, 칼빈은 단지 뛰어난 신학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뛰어난 교회개척운동의 지도자였음을 윌콕스 박사는 발견하게 되었다. 윌콕스 박사의 논문이 1993년에 나온 후에 미국 리폼드 신학교의 엘리아스 메데이로스 (Elias Medeiros) 교수가 2009년에 이를 더 자세히 연구하였다. 메데이로스 박사는 서양의 선교사학자들이 칼빈의 전도 및 선교 사역을 평가절하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추정했다. 첫째는, 제네바 서고에 보존되고 있던 칼빈 자료들을 이전의 학자들이 제대로 접하지 못했을 가능성, 둘째는, 그 자료들을 자세히 다 살펴보지 못했을 가능성, 셋째는, 칼빈이 주장한 예정론 및 하나님의 주권 신학에 대한 인식 때문에 칼빈은 전도 및 선교를 중요시하지 않았다는 편견에서 비롯된 결론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선교사역이 보안의 이유로 비밀리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사적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당시는 복음을 고백하거나 전파하는 사람들에 대한 핍박이 극심한 때였다. 재산을 잃고, 목숨을 잃는 시기였다. 칼빈 자신도 망명자였다. 몇 년 후에는 수만 명이 피의 순교를 당하고, 수십만 명이 학살과 핍박을 피해 나라를 떠나서 망명하는 시대였다. 그런 때에 하는 복음 선교와 교회개척이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제네바는 목사들의 명단을 기록으로 많이 남기지 않았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외에도 시편 강해를 비롯해 성경 강해를 많이 출간했다. 10년 사이에 160권 이상을 출판했는데, 이는 교회개척 사역을 하는 목사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편지를 많이 주고 받았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의 저술, 스타라스부르와 제네바에서의 종교개혁목회, 시편을 비롯한 성경 강해, 수백권의 저술에 이르기까지 매우 헌신된 삶을 살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칼빈은 유럽, 특히 프랑스에 복음적 교회개척사역을 하는데 집중하여 헌신되어 있었다.

 

3. 교회개척운동의 지도자 칼빈

칼빈은 유럽의 교회개척자들을 이끄는 지도자였다. 훈련, 평가, 파송, 자문, 서신 왕래, 기도를 했다. 칼빈의 죽기 전 10년가 절대적 관심은 교회개척을 통한 선교였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자.

1550년대에 제네바 인구는 1만에서 2만으로 두배로 늘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신앙 핍박을 피해서 온 피난민들이었다. 당시 칼빈의 제네바 사역은 1555년 경에 이르러 안정에 도달하게 된다. 제네바 시 당국과의 관계가 편안해지며, 칼빈의 언권이 인정받기 시작하는 때이다. 당시 제네바에는 스페인, 이탈리아, 스콧틀랜드, 영국,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에서 온 사람들이 조화롭게 복음의 도시를 형성하며 살고 있었다. 영국인 존 베일 (John Bale)은 “제네바는 마치 전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마치 성전과도 같이 열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습관, 언어, 의복에는 불일치하는 다국적의 사람들이 모여서 사랑하며 친구처럼 마치 그리스도의 회중처럼 거하고 있다.”고 썼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와 섭리 아래에서 제네바는 사역의 훈련소가 되었다. 다양한 문화와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서 존 칼빈의 가르침 아래 복음사역자로 훈련 받았다. 많은 이들은 매주 다섯 번 칼빈의 설교를 들었다. 그들은 칼빈을 통해서 구교의 잘못된 가르침과 문화를 벗어버리고 복음의 말씀과 복음에 합당한 태도와 문화를 배우게 되었다. 자신들의 문화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하며 무엇을 구속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자신의 문화와 배경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설교하며 전도하며 교회를 세울 수 있는지를 배웠다.

칼빈은 전도와 복음사역에 대해서 설교 중에 많이 다루었다. 예를 들어 디모데후서 1:8-9의 설교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상, 묻히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인들로서 일어서야 한다. 그리스도께 영예를 돌려야 한다. 우리가 온 세상이 너무나 길에서 벗어난 것을 볼 때에, 우리는 건전한 교리를 굳게 붙들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음 전도자로 부르신 것을 알면서도 복음을 증언하지 아니하여서 하나님께 불충성한다면, 그것은 바울이 책망하는 바,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칼빈은 또한 구약 선지서를 강해하면서 그리스도의 나라의 진보와 교회의 회복에 대해 강조했다. 칼빈은 복음 전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진보하며, 참된 교회가 회복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전도의 가장 좋은 수단은 교회라고 보았다. 칼빈에게 있어 전도 및 선교의 가장 적절한 수단은 복음 (말씀, 신학, 교리) 사역자를 길러서 파송하여, 그들을 통해서 복음에 헌신하는 교회들이 세워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교회들이 계속해서 사역자를 기르고 교회를 계속 개척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진보하게 하며, 참된 종교개혁을 이루게 될 것이었다 (칼빈은 교회개혁보다는 교회회복에 더 관심이 많았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진보는 개혁된 (‘참된’) 교회들을 세우는 것을 통해서 이루진다고 보았다.

칼빈은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설교와 강의를 많이 하였다. 윌콕스가 제네바의 먼지 앉은 서고를 확인한 바에 의하면, 1554-1556년에는 제네바시에 망명 온 사람들이 매년 3백여 명이었고, 1557년에는 886명, 1558년에는 632명이었다. 이들은 개신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찾아온 피난민이었다. 이들 중에서 상당수가 칼빈의 설교를 듣고, 강의를 들었다. 특히 제네바 아카데미는 학생들, 사역자들, 그리고 청강생들이 들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제네바 아카데미는 망명객, 피난민, 체류자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무장시켜서 다시 세상 속으로 전쟁을 하러 보내는 훈련소와 같았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특히 프랑스에, 복음의 사역의 진보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칼빈의 설교를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되었다. 칼빈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고국을 향해 심장이 불타오르게 되었다.

 

4. 복음사역자에 대한 훈련, 평가, 파송, 지원

칼빈은 또한 목회자를 파송해 달라는 요청을 도처에서 받았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목사를 보내달라고 우리를 찾아왔다. 그들은 성직 자리를 구하는 가톨릭교도보다 열정이 있었다. 목사를 보내 달라는 사람들이 문 앞에서부터 에워쌌다. 탄원하기 위해 법정에 가는 사람들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 같았다. 그들의 바람이 성취된다면 기쁘겠지만 그들에게 파송할 목사들이 없었다. 문학적, 신학적 교육을 조금도 받지 않았을 것 같은 사람도 오래 전에 사역자로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칼빈은 모든 사람을 파송하지는 않았으며, 그들을 먼저 훈련하고 싶어했다. 사역자들 중에 목사로 임직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칼빈은 엄격한 기준을 따르도록 요구했다. 개척목사 후보자는 도덕적 삶이 증명되어야 했으며, 신학적 수준과 설교의 능력도 주의 깊게 조사를 받았다. 목사들의 도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목회자들이 서로서로 책임지는 시스템을 만들게 했다. 목회자에게 용납될 수 없는 행위에 대한 윤리규정들이 있었다. 금전 문제, 부정직, 성적 비행이 있으면 즉각적으로 파면되었다.

칼빈의 모든 학생들은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고 헬라어에 능통해야 했다. 그 목적은 성경 주해를 한 줄 한 줄 능숙하게 할 수 있기 위한 것이었다. “좋은 사역자는 좋은 신학자여야 합니다.” 칼빈은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법을 가르쳤다. 칼빈은 교회개척 후보생들에게 교회사와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신학을 배우게 했다. 성품 훈련도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였다. 그들의 성품을 평가했다. 그들이 복음의 사역자로서 합당한지를 확인하려고 했다. 목회자들은 순교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강인한 성품과 끈기를 가졌다고 생각되는 목회자 후보생들만을 프랑스에 복음을 설교하며 교회를 세우도록 파송했다. 사실, 기록에 남은 88명 중에서 아홉 명은 자신의 목숨을 순교자로서 바쳤다. 칼빈은 프랑스 외에도 이태리, 네덜란드, 헝가리, 폴란드, 라인강변의 국가들, 브라질, 영국 등에 다수의 복음 사역자를 파송하였다.

각각의 교회는 대개 처음에 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제네바에서 파견된 목사들은 마치 2차대전 때 레지스탕스처럼 다락에 숨고, 아는 사람의 집에서 집으로 숨어들어 가면서 목적지까지 갔다. 많은 교회들이 가정, 다락, 공터, 묘지 등에서 모였다. 사람들이 모이고 신앙훈련을 받은 후에 외적으로도 교회로 모습을 갖추도록 했다. 핍박이 없던 때에는 매우 많이 모이는 교회들도 나타났다. 당시 개신교가 불법이었므로 칼빈은 집에서 집으로 비밀모임처럼 모이도록 했다.

치명적인 경우에는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고 사형당할 위험도 감수하면서 교회개척이 이루어졌다. 칼빈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전투이며 갈등이라고 생각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 자체로 평화롭지만, 인간의 악의와 사악함 때문에, 격동이 일어나지 않고 세워지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칼빈은 대부분의 목회자 파송을 비밀스럽게 진행하였다. 마치 첩보 스파이를 심듯이 하였다. 피난 나온 고국에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기에 제네바 시당국과 목자회는 사역자들의 목숨을 지켜주기 위해서 기록을 남기지 않기로 한다. 당시 절박한 정황에서 칼빈은 프랑스에 수백 명이 넘는 교회개척 설교자들을 비밀리에 파송하였다. 공식적으로는 프랑스로 파송된 88명이 있다. 그렇지만 멘쯔거는 최소 2백 명 이상의 선교사가 파송되었다고 본다. 제네바 시 당국은 처음에는 사역자 파송의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알게 되며, 1557년에 이를 추후 비준했다. 교회개척을 통한 프랑스 전도사역은 제네바 ‘목자회’에서 별도로 진행하였다. 개혁교회가 너무 많이 세워지는 것에 대해 프랑스 정부가 제네바 시당국에 항의서한을 보내온 적이 있다. 그 때에 제네바 시는 “무슨 목사를 우리가 보냈단 말입니까?”라고 반문했다. 시는 목사를 보낸 적은 없었다. 제네바의 목자회가 보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단지 그들을 훈련하고, 재정을 주고, 파송하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 파송 이후에, 칼빈은 그들과 자주 편지 왕래를 했다. 칼빈과 목사들 사이에 오고간 수천 통의 편지가 남아 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글을 쓰면서 이 모든 일이 잘 진행되도록 힘썼다. 그는 가톨릭의 오류와 비성경적인 것이라 생각되는 것들과 힘써 싸우기 위해 글을 썼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외에 교리문답, 교회력 소개, 시편 강해, 시편 찬송가, 서신서 등을 발간했다. 이 책들은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당시 출판사들이 출간한 책이 도합 500여 권이라고 하는데, 칼빈이 1551년에서 1564년 사이에 쓴 책만 160여 권이라니 칼빈의 헌신을 짐작할 수 있다. 칼빈은 이것을 종교개혁 곧 복음사역운동의 무기로 보았다. 칼빈에게는 도처에서 목회자를 보내달라는 요구가 진정되었다. 그 수요는 도저히 맞출 수가 없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진 전사들을 길러서 파송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진리를 두려움 없이 붙들며 싸울 수 있도록 전쟁터에 나간 복음 사역자들에게 편지와 성경강해를 계속 보냈다.

 

5. 칼빈의 교회개척운동의 결과

훈련된 자신의 제자들을 프랑스로 보내어 부르주아 계층을 중심으로 복음 운동을 시작하면서 개혁 운동은 점차로 확산되게 된다. 이 때 칼빈의 가르침을 따른 프랑스 개혁자들을 위그노(Huguenots)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세력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간다. 대학 교수, 의사, 변호사와 같은 지식층은 개혁 운동만이 프랑스를 살릴 수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하면서 적극 동참하였다. 제네바에서 훈련받고 파송받은 목회자들은 프랑스 전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프랑스 전역에 복음을 들고 스며들었다. 그래서 복음이 프랑스 전체를 사로잡았다.

1555년에 칼빈과 제네바의 지원자들은 프랑스에 다섯 개의 교회를 세웠다. 이중에 조직교회는 한 교회뿐이었다. 4년 후인 1559년에는 교회 수가 1백 개로 늘어났다. 그리고 1562년에는, 칼빈과 제네바와 협력 도시들과 함께 개척한 교회가 최소 2,150개로 증가했다. 인구의 15%인 3백만 명 정도가 개혁주의 교회가 되었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한다. 이는 약 10년 사이에 일어난 폭발적인 부흥의 역사였다. 50년이 안되어 대핍박 이전에 프랑스 인구의 1/4이 칼빈주의로 돌아왔다고 학자들은 보기도 한다. 추방 당하기 직전 무렵에는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칼빈주의였다고 맥페트리지 (McFetridge)는 추정하기도 한다.

어떤 교회들은 4천, 6천, 8천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들이 되어서 교회개척사역을 계속했다.

당시 프랑스 베르즈락 (Bergerac)에서 사역하는 교회개척자는 다음과 같이 칼빈에게 편지를 보냈다. “여기 이 지역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많은 부분에서 사단이 이미 쫓겨났으며 우리는 사역자들이 자립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들은 자신들의 분립교회들을 개척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우리는 성장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이 열매를 맺게 하여 주셨습니다. 주일마다 4천에서 5천 명의 사람들이 예배에 모여서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몽펠리에 (Montpellier)에서 사역하는 목사의 편지도 있다. “우리 교회는 주님의 은혜로 날마다 성장하고 전진하여 우리가 일요일에 세 번 설교를 해야만 합니다. 다 합쳐서 5천에서 6천 명의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툴루즈 (Toulouse)에서 개척한 목회자는 제네바에 이렇게 보고하였다. “우리 교회는 놀라운 숫자로 성장했습니다. 8천에서 9천 명의 영혼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캐더린 왕비가 조사하여 교황에게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칼빈 사후 8년인 1572년, 프랑스에는 2,150개의 개혁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1555년에 개혁교회가 불과 5개였던 것에 비교해 보면 엄청나게 폭발적인 교회 수의 증가였다. 당시 인구 2천만 명 중에서 3백만 명이 개혁주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보고들이 있을 정도로 칼빈의 교회개척운동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희생 없는 부흥은 없었다. 프랑스 교회는 1562년 위그노 전쟁,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프랑스 전국에서 가톨릭 교도들이 위그노들을 학살하였다. 7만명 정도가 학살되었다고 역사는 전한다. 앙리 3세가 암살되고, 나바라의 군주 앙리(엔리케)가 부르봉 왕조를 열고, 앙리 4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낭트 칙령을 세워 위그노들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가톨릭을 프랑스의 국교로 삼기 위하여 낭트 칙령을 폐기하자, 수많은 위그노들이 네덜란드, 영국, 프로이센 등지로 망명하게 되었다. 일부는 북아메리카 (현재의 뉴욕과 캐롤라이나지역)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상공업은 물론, 여러가지 기술을 지니었던 그들이 망명하자, 프랑스의 경제는 몰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프랑스에서는 개혁교회의 존재가 매우 미미하게 되었지만, 유럽 전역과 미국으로 종교개혁이 확산되는 역사가 이루어진다.

 

6. 나오며: 칼빈을 통해 배우기 위한 묵상과 질문

(1) 칼빈은 위대한 신학자였을 뿐 아니라 동시에 위대한 교회개척운동 지도자였다. 칼빈의 신학은 목회로 증명되고 완성되었다. 만일 진정으로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루려고 한다면 복음 본연의 무기를 가지고 세속 및 비진리와 싸우는 교회개척사역을 하는 것이 지당하겠다. 건물이나 제도나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는 복음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교회개척운동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지 한국교회가 고민하기를 제안한다. 한 개의 큰 교회를 만들거나 유지하는 목표를 가지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가 더 많은 교회들이 형성되고 세워짐을 통해서 진보하도록 고민하고 있는가?

(2) 칼빈은 위대한 설교자였을 뿐 아니라 동시에 위대한 교사였다. 칼빈은 개척준비자들의 신학 뿐만 아니라 강인하고 견고한 성품도 훈련하게 했으며, 치명적인 죄를 철저히 다스리고 경계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문화와 배경과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는지 준비되도록 하기 위해 후보생들에게 인문학 지식을 가지게 했다. 성경과 세상 사이에 복음의 다리를 놓는 사역을 시킨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지속적인 훈련과 과정이 있는가? 대부분의 개척목사들이 거의 준비 없이 맨땅에 헤딩하고 있는 현실을 본다. 우리 한국교회에 교회개척을 위한 목회자 훈련을 위한 교회개척학교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는가? 단순히 미자립교회 목회자들 위로하는 선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내용과 교과과정을 가지고 실제적인 전도사역, 복음사역이 일어날 수 있도록 교회개척준비자 과정이 필요하지 않는가?

(3) 칼빈은 위대한 목회자였을 뿐 아니라 동시에 위대한 코치였다. 칼빈은 파송한 다음에도 계속해서 수많은 편지를 나누고,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서간문을 발행해서 목사들을 도왔다. 현대의 교회개척은 종교개혁시대와 비슷하게 매우 적대적인 환경 속으로 개척자가 들어간다. 제네바의 교회처럼 규모가 있고, 실력이 있고, 사람과 재정이 모이는 교회라면, 칼빈처럼 복음사역자들을 훈련하고 준비시켜서 교회개척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실질적으로 넓히도록 힘쓸 용의는 없는가? 돈으로 하는 선교나 개척말고, 실제로 사람을 목표를 가지고 키우며, 지속적으로 교육시키고 멘토링하고 함께 배우고 함께 씨름하면서 전선에 나온 전우 목회자들을 돕는 일들이 한국 교회에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는가? 재정지원으로 돕는 것도 귀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재정보다는 훈련과 코칭이라면, 이 부분은 한국교회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한국 교회에서 제네바와 같은 역량, 칼빈과 같은 지성과 지도력을 가진 교회들과 목회자들은 과연 어떻게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가?